잔인한 봄이었다. 바다에선 삼백의 목숨이 가라앉았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각자 크고 작은 타격들을 입었다. 나는 연인과 헤어진 터라 더 우울했다. 이별 후의 상실감은 언제나 버티기 어려웠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 있는 게 힘이 들어서 먹거나 수업을 듣거나 공부하는 시간을 빼고는 무조건 잠을 잤다. 올 봄은 유독 날씨 좋은 날이 적었다. 사람들은 무표정으로 흐린 하늘 아래를 걸었고, 나는 잠이 아니면 술에 취한 상태로 봄날을 보냈다.
3년 전에도 우울한 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다니던 학교에서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명의 학생이 목숨을 끊었다. 학교 분위기는 비통했고 괜찮은 줄 알았던 나에게도 뒤늦은 후폭풍이 밀려왔다. 대전역에 앉아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벌써 여러 개의 부고를 들은 후였다. 선로 옆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있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울음을 뽑아냈었다. 그때도 한창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시기였다. 꽃잎 날리고 벌레들이 바빠지는 시기였다. 바람이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때도 난 이번 봄이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다.
주제로 주어진 단어들이 봄이고 바다라, 도무지 예쁜 글을 쓸 수가 없다.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다는 이제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야속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바다는 낭만적이기만 한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봄. 생명이 한창 태어나고 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봄날의 슬픔은 유독 아프고 밉다. 참담한 기분으로 따스한 햇빛 아래를 걸으면 그 괴리감 때문에 더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3년 전의 그 봄학기를 마치고 나서 나는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와 방학 내내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많은 것을 생각했다. 죽음과 죽음 후의 그 온갖 난리들과 그 속에 들어있던 나를 생각했다. 그 죽음들이 나에게 미친 영향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대전역에서 울음을 뱉어내던 그 날처럼, 그 봄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생각들이 정리되어 모니터 위에 적혔다. 나는 독을 뱉어내는 것처럼 글을 썼고, 짧았던 글은 점점 길어졌다. 몇 번이고 읽으면서 거친 부분들을 다듬었다. 방학 내내 그 일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천천히 잔인했던 그 봄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 봄학기를 돌아볼 수 있게 된 순간, 나에게도 그해 여름이 찾아왔다.
2014년의 봄은 세월호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은 칼집을 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장마가 오고 그 후에 다시 쌀쌀해지더라도 아직 올해 봄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3년 전에 봄을 떠나보내고 여름을 맞기까지 걸렸던 시간의 몇 곱절을 보내야 비로소 이번 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괴로움에 웅크려 앉아 오래오래 울어야 할 것이다. 그런 종류의 슬픔은 타인이 위로해주기 무척 힘들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웃을 일이 있더라도 곧이어 죄책감이 밀려올 것이기 때문에 14년의 봄은 좀처럼 그들을 놔주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끝내 여름을 맞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이 잔인했던 봄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봄날이 지나가면 분명, 여름은 온다. 여름이 오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봄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질 수는 있다는 사실이다. 봄이 끝난다는 것이 죽음을 잊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2018년의 여름이 되더라도 나는 11년과 14년의 봄을 여전히 기억할 테니까. 그러나 더 이상 그 당시처럼 괴로워하지는 않을 수 있다. 찬찬히, 차분하게 그 비통했던 봄을 기억할 수 있다.
아직은 2014년 4월 16일에 머물러 있을 그들이 아주 천천히라도 걸어 걸어 언젠가는 여름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 슬픈 봄날 이전만큼 행복하기는 어렵더라도, 조금씩은 덜 괴로워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렇게 잔인한 봄의 한가운데서, 여름날의 매미소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