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에 30분은 내리 앉아있었다.
그날은 9월 모의고사가 있던 날이었고 따뜻하게 내리쬐던 가을 햇빛 아래 내 손에는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모의고사 시험지가 들려있었다. 그동안 죽도록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하긴 죽지 않고 살아서는 이따위 점수를 보고 있자니 내 노력이 죽을 만큼은 아니었구나. 학원에 가려고 어찌어찌 버스를 타고 오긴 했지만 한번 나가버린 정신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나는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고 100일도 남지 않은 수능 걱정과 그보다 더 아찔한 내 모의고사 성적 걱정에 학원 수업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한참 한숨을 토해내다 고개를 들었는데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랑 같은 학원에 다니는 김지연이었다.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거의 반년을 같이 종합반을 들었던 터라 얼굴은 익숙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그 애의 초점 없는 표정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누가 봐도 나만큼이나 망한 표정이었다. 그 애와 섞어본 말이라고는 서로 펜이나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부채 관계 정도의 대화가 다였으나 나는 어쩐지 동지애 비슷한 감정이 들어버렸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를 알아 봐주길 바라며 헛기침을 하면서 다가갔는데 얼마나 넋이 나갔는지 내가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 애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야.”
“아, 씨발 깜짝이야!”
대뜸 욕을 먹었다. 그 애는 많이 놀랐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에게 왜 그렇게 조용히 와서는 사람을 놀래 키냐며 성을 냈다. 나는 그냥 너를 불렀을 뿐이고 갑자기 욕먹어서 놀란 건 나인데 조금 억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는 그날 그냥 욕이 하고 싶었던 거다.
“넋 놓고 있는 거 보니까 너도 모의고사 망했구나?”
“어. 진짜 끔찍해. 6월 모의고사보다 점수 더 떨어졌어.”
“나돈데.”
“우리 내년에 재수학원에서 보는 걸까?”
“재수 없는 소리 하네.”
우리는 재수 소리에 안 그래도 없던 웃음이 파삭 말라버렸고 또 한동안 말없이 정류장 벤치에 앉아있었다. 학원에 가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도저히 갈 기분도 아니었다. 어디든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근처 파란색 표시의 지하철 출입구. 그래, 4호선의 종착역인 오이도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모의고사도 망했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 애에게 오이도에 가겠냐고 물었고, 그 애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시험도 망한 주제에 학원까지 째 버린 우리는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매섭게 교통카드를 개찰구에 찍었고 대담하게 지하철 빈 노약자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학원이 있는 노원에서 오이도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고, 세 정거장 정도를 지나고 나서야 나는 김지연과 이 20년 같은 2시간의 침묵을 견딜 만큼 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꾸 초조하게 입술을 뗐다 붙였다 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그 애는 가방에서 MP3를 꺼내 이어폰 한쪽을 나에게 내밀었다.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 흘러나왔다.
오이도에 도착하니 해가 제법 내려앉은 후였다. 우리는 바다를 보려 역에서 나와 버스에 올라탔고 곧 저 멀리서 오이도를 비추는 빨간 등대가 모습을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바다를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동시에 뛰기 시작했고 그곳엔 지치지도 않는 푸른 바다가 끊임없이 철썩거리고 있었다.
“나 지금 너무 기분이 너무 좋아! 너 따라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
김지연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아까 욕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어서 살짝 웃겼다. 어쨌든 그 애가 웃으니 나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이미 시험 성적은 내 머릿속을 떠난 지 오래였고 오이도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니, 그전에 횡단보도를 건너서 그 애에게 아는 척하기를 잘했다.
우리는 바다를 한참 보다 내려와 조개구이 식당들이 끊임없이 이어진 도로를 걸었다. 가게 앞 여기저기서 아주머니들이 우리 가게에서 먹고 가라며 아우성이었다. 우리는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너무나 배고파졌다. 하지만 내 주머니엔 딱 만 원 한 장과 교통카드뿐이었다.
“너 돈 있어?” 그 애가 물었다.
“나 만원밖에 없어.”
“아, 나도 만원밖에 없는데. 이만 원으로 조개구이는 못 먹겠지?”
김지연이 아쉬운 표정을 짓길래 나는 호객행위를 제일 열심히 하시던 아주머니에게 되돌아가 혹시 이 만원으로도 조개구이를 먹을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나와 뒤에 있는 김지연을 슬쩍 훑더니 먹을 수 있으니 들어오라고 하셨다. 우리는 깜짝 놀라 아주머니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헐레벌떡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안내받고 앉아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확인하니 조개구이 옆에는 이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 적혀있었다. 약간 긴장한 우리는 마른입만 다시며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고 곧 아주머니가 조개와 반찬으로 가득 찬 큰 회색 쟁반을 들고 우리 자리로 오셨다.
하나하나씩 옮겨지는 반찬과 조개는 생각했던 양 보다 훨씬 많았다. 어리둥절해진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고 김지연은 이만 원 밖에 없다고 확실히 말했냐고 확인하는 듯 자꾸 아주머니 몰래 나에게 브이를 내밀었다. 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지만 나조차도 나중에 돈을 더 받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일부러 많이 준 거야. 맛있게 먹고 다른 데 갈 생각하지 말고 얼른 집에 들어가.”
아주머니가 자리를 뜨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우리를 가출 청소년 정도로 오해를 하신 것 같았다. 밤늦게 오이도를 터덜터덜 걷고 있는 가진 돈도 이만 원이 다인 교복을 입은 청소년 두 명이라니. 오해할 소지가 다분했다.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김지연의 머리를 가리키며 너 때문이라고 웃었고 그 애는 너는 교복 넥타이나 똑바로 매라며 웃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 많은 음식을 단돈 이만 원에 내어 주신 아주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고 우리는 뜨거운 불판 위에 입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조개들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금세 하나둘씩 보글보글 입을 벌리는 조개들이 마치 엄마 아빠를 찾는 귀여운 아기 새들 같았다. 창밖에는 사람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이 펑펑 소리와 함께 새까만 밤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