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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May 19. 2021

조중헌의 동아건축사를 생각하다

1927년 1월 6일, 이훈우는 <중외일보>에 <우리의 주택은 첫째 구조부터 고쳐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다. 이때 이훈우의 소속은 동아건축사무소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훈우가 1920년 12월 10일에 개업한 개인 건축사무소의 이름은 바로 '이훈우건축공무소'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이훈우건축공무소가 동아건축사무소로 이름을 바꾸었거나, 이훈우가 개인 사무소를 접고 동아건축사무소라는 곳으로 소속을 옮겼거나.

<중외일보> 1927년 1월 6일자 이훈우의 기고문 중 일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그런데 <조선일보> 1924년 1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성 통의동 118번지에 사는 25세 조중헌(趙重軒)이라는 사람이 1921년에 도쿄에서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이번에 자택에 동아건축사라는 이름의 건축사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동아건축사에서는 가옥의 설계, 건축 등에 종사하며 순전히 조선인이 경영하는 건축사는 이번에 처음이라고 기사에서는 적고 있다. 이훈우건축공무소가 이미 1920년에 생겨났기 때문에 이것이 정말 최초의 조선인 경영 건축사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들지만 어쨌든 1924년에 '동아건축사'가 생겨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동아건축사와 동아건축사무소. 이름이 네 글자나 똑같은 이 두 사업장은 과연 같은 곳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곳일까?

<조선일보> 1924년 1월 12일자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두 곳의 관계도 불명확하지만 조중헌이라는 인물의 정체도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가 다녔다고 하는 도쿄의 건축학교 역시 어느 곳인지 아직 확정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 그의 출신과 집안을 추정할 만한 하나의 단서를 <매일신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매동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안영(安泳)이라는 학생이 어머니를 위하여 단지, 즉 손가락을 끊는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어머니가 아프자 치료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학교 교장과 교직원, 학생들과 유지들이 동정금을 보내왔다고 하는데, 그 동정금 기부 명단 중에 1원을 기부한 조중헌의 이름이 보인다.

<매일신보> 1920년 1월 19일자 기사 중 '통의동 125 조중헌'(사진 왼쪽에서 다섯번째 줄)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조중헌의 주소지가 통의동 125번지로 되어 있어, <조선일보> 기사에 나온 통의동 118번지와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1912년에 조사된 토지조사부와 1917년에 간행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따르면 1912년과 1917년에 통의동 118번지의 토지 소유자로 등재된 사람은 김태환(金泰煥)이라는 인물이다. 다만, 192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서는 소유자가 우단득(禹丹得)으로 바뀌어 있다. 한편, 같은 시기 통의동 125번지의 토지 소유자는 조창희(趙昌熙)라는 인물로, 1927년에는 125-1과 125-2로 분할되어 역시 각각 가와치 덴지로(河內傳次郞)와 이경문(李景文)의 소유로 바뀌어 있다. (* <경성부관내지적목록>의 열람에는 이재우 님의 도움을 받았다)

1912년에 측량된 경성부 지적원도 중 통의동 부분. 체크한 부분은 118번지와 125번지. (출처: 국가기록원 지적 아카이브)

어쨌든 118번지보다는 125번지의 소유자인 조창희 쪽이 조중헌과 같은 조(趙)씨로 좀더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조창희란 어떤 인물인가? 통의동 125번지는 대한제국 시절에는 북서 순화방 사재감계 북장동 3통 2호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되며, 1906년에 작성된 북장동 3통 2호의 조창희 호적이 남아 있어 보다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호적에 따르면 조창희(호적에서는 昌凞)는 당시 나이 52세로, 본관은 양주이며 조병근의 아들로 직업은 기사(技師)라고 되어 있다. 양주 조씨에서는 병ㅇ(秉ㅇ)-ㅇ희(ㅇ熙)-중ㅇ(重ㅇ) 순의 항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중(重)자가 들어가는 조중헌은 양주 조씨로 조창희의 아들대에 해당하는 인물로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1924년 당시 조중헌이 25세(1900년생)라 하였는데, 호적 상으로 조창희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맏아들이 15세(1892년생), 둘째 아들이 8세(1899년생), 셋째 아들이 5세(1902년생)라고 하니, 약간의 오차를 반영한다면 1899년생 둘째 아들과 1900년생 조중헌이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1906년 한성부 북서 순화방 사재감계 북장동 3통 2호 조창희 호적 (출처: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조창희의 직업은 '기사'라고 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 <관보> 등을 살펴보면, 조창희는 1899년에 내장사(內藏司) 수륜과(水輪課)의 사검위원(査檢委員)으로 임명되었고, 1903년 3월에는 수륜원 주사(主事), 같은해 5월에는 수륜원 기사(技師)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수륜원이란 궁내부에 소속되어 수리, 관개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비록 수륜원은 1904년에 폐지되었기는 하나, 이때 기사에 임명된 조창희가 1906년 호적에서도 직업을 '기사'로 삼고 있는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창희가 수륜원 기사로서 얼마나 실무에 관여하였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의 친족(어쩌면 아들)인 조중헌이 건축을 공부하게 된 것도 이러한 기술직과의 인연이 배경에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중헌의 존재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고, 이훈우와의 관계도 아직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조중헌에 대하여 좀더 깊이 파헤칠 수 있게 된다면 이훈우와의 연결고리, 나아가 1920년대 근대건축 역사의 잃어버렸던 한 조각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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