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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Jan 02. 2022

독립운동가 김의홍

같은 해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젊은이의 엇갈린 운명

초기 근대건축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이훈우(李醺雨, 1886~1937?)는 1886년에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지금은 악양면) 입석리에서 태어났다. 이훈우는 형들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처음에는 도쿄에 머물렀고, 1908년 4월에는 나고야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일본 유학을 하게 된 데는 자식들이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나라가 외국에게 수모를 겪는 일을 막을 수 있도록 신학문을 익혀 재능을 키우게 하려는 아버지 이종구의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훈우와 같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입석마을에서 태어난 김의홍(金義洪, 1886~1908)이라는 인물이 있어 눈길을 끈다. 심지어 태어난 해도 1886년으로 똑같다. 나중에 언급할 1908년에 작성된 보고서에서 김의홍의 나이가 22세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만 나이로 보면 1886년생이 된다.


정재상이 지은 『하동의 독립운동사』(악양면청년회, 2000)에 따르면 김의홍은 일명 김병원(金炳源)이라고도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고 대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김의홍은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우기를 각오하고 의병에 가담하였는데, 1907년 8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지리산 기슭인 하동, 구례, 산청, 함양, 진주 등지에서 고광순, 권석도, 박매지 의병장의 휘하에 있었다고 하며, 특히 박매지와 함께 구례 연곡사 전투, 칠불사 전투, 악양봉대 전투, 신금벌 전투 등 많은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김의홍의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되는 관련 문헌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 수록된 진주경찰서장의 보고서들이다. <폭도에 관한 편책>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 측이 의병들을 탄압한 행위에 관련된 자료들이다. 현재는 성남 나라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국가기록원 사이트 등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그 중 진비수(晉秘收) 제282호-1, 즉 융희 2년(1908) 4월 2일 진주경찰서장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낸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폭도가 일진회원을 총살한 건

지난달 29일 동틀 무렵 부내 하동군 청암면 회신촌의 폭도 약 15, 6명이 일진회원 장윤화(張允和)를 집에서 붙잡아 마치(馬峙)라는 곳으로 데려가서 총살하고, 또 기르는 소 2마리를 탈취하여 떠나갔다고 한다. 그들이 군내 외횡보면 및 마전면에 횡행했다는 정보를 접한 하동 주재 순사는 엄중히 정찰하며 경계 중이다. 이상 보고합니다.


'폭도'가 출몰하여 일진회원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당 지역으로 순사와 수비병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4월 6일의 미야가와 보고(진비수 제282호-3)에는 이후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월 30일에 외횡보면과 마전면 등에 의병 약 14, 5명이 출몰하여 청암면 방면으로 떠나간 사실이 확인되자 하동수비대 6명과 하동주재소 한국인 순사 이부전 일행은 30일 오전 8시에 하동을 출발하여 서둘러 정찰하였다. 그리고 의병 약 5명이 밤중에 화평촌(華坪村)이라는 곳을 통과하고 31일에는 10명의 의병이 같은 장소를 통과하여, 심곡촌(深谷村)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토벌대' 일행은 심곡촌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까지 그들의 뒤를 쫓아 폭도들이 부락 안을 배회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수비대가 급히 돌격하자 이를 목격한 의병들은 허둥지둥대며 무너졌다. 일제 사격을 받은 뒤 6명이 사망하자, 의병들은 시신을 버려두고 하동군 읍내의 삼거리와 악양면 방면으로 패주했다.


그날 밤, '토벌대'는 악양서면 정자촌에 숙영하였다가, 일찍이 의병의 우두머리로 의심받고 있었던 김의홍이 입석마을의 자택으로 돌아와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4월 1일 오전 3시, 김의홍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체포하고 하동으로 돌아왔다. 정재상은 김의홍이 4월 6일에 체포되어 압송되었고 이틀간 고문을 당했다고 적고 있지만, 4월 6일은 보고서가 작성, 제출된 날짜이며, 기록을 살펴보면 4월 1일에 체포된 것이 맞다.


김의홍의 최후에 대해서는 4월 14일 미야가와 보고(진비수 제282호-4)에 나와 있다. 4월 8일, 체포되어 있던 '폭도 수괴' 김의홍이 예전부터 임봉구, 박매지 등의 의병장들과 왕래하여 그들의 거처를 잘 알고 있으므로, 하동주재소의 후루카와(古川) 순사는 김의홍을 길잡이 삼아 '폭도 수색'을 하려고 했다. 후루카와는 한국인 순사 2명을 데리고 하동수비대 병졸 4명과 함께 화개면, 악양면 일대의 수색에 나섰지만 의병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정재상은 김의홍이 의병장들의 도피를 도와 의병대가 있는 반대쪽으로 유도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때 김의홍은 악양서면 신흥촌에서 도주를 기도하여 안쪽 산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김의홍이 인근의 험악한 지형을 교묘히 활용하여 도주했기 때문에 수색대는 추적해 보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도저히 체포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신흥촌에서 약 3km 떨어진 계곡에서 수비대 병사가 김의홍을 발견해 총살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김의홍이 수비대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던 1908년 4월은 공교롭게도 동갑내기 이훈우가 나고야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던 달이었다. 일제에 항거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김의홍과 유학을 통해 조선 건축계의 유일한 기술자로 돌아온 이훈우.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저마다의 각오와 의지를 갖고 시대의 물결을 헤쳐나가던 젊은이들의 삶은 이처럼 사뭇 달라 보인다. 과연 역사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 듯하다.


※김의홍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한 정부에서는 200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김의홍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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