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갈명, 묘비명, 하동군사
이종구(李鍾龜, 1849~1917)는 건축가 이훈우의 아버지로, 이규철과 수성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경상남도 하동 지역의 양반이었다. 이훈우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떤 배경 속에서 성장하였고, 어떻게 건축 유학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아버지 이종구의 행적을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논문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에는 이종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묘갈명에 따르면 이종구는 1849년에 태어나 1862년에 아버지를 여읜 뒤 지방관의 막료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경상남도 하동에 자리를 잡았다. 1888년에는 광무국 주사로 임명된 바 있고, 1910년에는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다만,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이종구의 주사 임관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중략)
묘갈명에 따르면 아버지 이종구는 외국의 신학문을 기피하는 당시 영호남 선비들의 분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옛 학문과 새로운 학문으로부터 각각 장점을 뽑아 자신의 약함을 보충할 것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자식들이 그 나라 백성된 책임을 다할 수 있게끔 넓은 세상으로 보내 재주와 지식을 단련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세 아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여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그들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 여러 분야에서 사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39~40쪽)
여기서 말하는 '묘갈명'이란 창강 김택영이 갑자년(1924)에 저술한 <한 통정대부 광무국 주사 이공 묘갈명>이다. '지방관의 막료'라고 하는 것은 '客遊于州郡幕府記室之間', 즉 주(州)와 군(郡)에서 지방관을 보좌하고 문서 사무를 보는 사람으로서 지방을 돌아다녔다는 문장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조선 후기에는 사사로이 임명되어 지방관의 비서 일을 맡는 책객(冊客)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종구는 책객과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다. (책객에 대해서는 김인걸 선생님의 가르침에 의함)
김택영이 쓴 묘갈명은 이종구의 큰아들 이은우의 간청에 따라, 허송서라는 사람이 쓴 행장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문장이다. 이종구에 대한 정보가 허송서를 거쳐 전달되었기 때문인지 묘갈명에는 다른 기록과 충돌하는 내용이 확인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묘갈명에서는 이종구가 무오년(1918) 12월 13일에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1930년에 편찬된 『경주이씨세보』에는 정사년(1917) 12월 13일 사망으로 기재되었다. 또한 묘갈명에서는 이종구가 아들들을 유학시키기 전에 '내가 다행히 아들이 다섯 있으니'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맏아들 은우와 둘째 아들 진우가 유학을 간 것이 1905년 무렵이었다. 하지만 『경주이씨세보』에 따르면 넷째 아들은 1907년, 다섯째 아들은 1917년에 태어났으므로, 아들이 다섯 있다는 발언은 유학 직전에는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아들 다섯 발언이 후대에 이루어진 것을 착오로 넣었을 가능성이 있음은 논문 <1900년대 재일본 한국유학생의 활동과 그 배경>에서 지적된 바 있다.
그런데 작년에 현지 조사를 통하여 하동군 악양면에 위치한 이종구의 묘비에 새겨진 묘비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묘비명은 계해년(1924) 정월 25일에 아들 이은우가 지은 문장으로, 김택영이 지은 묘갈명보다 1년 앞서는 것이며 아버지의 행적을 직접 전한다는 점에서도 좀더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 여겨진다. 묘비명에는 이종구의 몰년이 정사년으로 기재되어 있어 『경주이씨세보』의 기재와 일치하는데, 아마도 『경주이씨세보』 의 수단(收單) 과정에서 이은우가 정보를 제공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묘비명에 따르면 이종구의 아버지 이규철(李圭哲)은 세거지(世居地)였던 예산을 떠나 한성으로 옮겨갔다. 이종구는 기유년(1849) 11월 17일 한성에서 태어났으나 14세 되던 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고, 가업이 다 없어져 가난과 고생을 겪었다. 이에 한성에서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권유로, 생계를 잇기 위해 여러 고을의 기실(記室)을 거치며 사무를 보고 재산을 쌓아 마침내 하동에 정착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종구에게는 한성에서의 기반이나 인적 네트워크가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큰아들 이은우가 1881년에 한성부 '흑동(黑洞)'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이은우 묘비와 지방지에 보이는 것(흑동은 묵동의 오류로 추정됨)도 1881년 무렵에 이종구 일가가 한성에도 거처를 두고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한편, 1978년에 발간된 여재규의 『하동군사』에도 이종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재규는 1930년부터 군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였지만, 6.25를 겪으면서 자료가 불에 타자 부산과 서울에서 다시 수집하여 1971년부터 편집에 착수해 1974년에 원고를 완성했다고 한다. 『하동군사』에 따르면 이종구와 아들 이은우, 그리고 손자 이상경은 3대에 걸쳐 서예를 잘 썼는데, 이종구는 소자(小字)에 능했다고 한다. 또한 인물편에는 이종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서술이 눈에 띈다.
李鍾龜: 관―경주. 충남 예산서 악양면 입석리에 전입함. 통정대부. 평남도관찰부 주사. 처―숙부인 밀양 朴씨(자식이 없음). 아들―恩雨, 珍雨, 勲雨, 讓雨, 美雨, 사위―李明鉉
예산에서 하동군 악양면 입석리로 전입하였다는 정보와 통정대부라는 품계는 묘갈명 및 묘비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평남도관찰부 주사'라는 관직이다. 이 정보는 묘갈명, 묘비명, 족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대한제국의 관보(官報)와 승정원일기 등의 공적 기록에서 1901년 12월 16일에 평안남도 관찰부 주사에 임명된 후 같은 달 18일에 의원면직된 이종구(李種九)라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논문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광무국 주사와 통정대부라는 경력은 공적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관보 등을 살펴보면 李鍾九, 李種九, 李種龜 등 한자 표기가 다르고 발음이 같은 '이종구'들의 임관 기사가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다. 개중에는 하동의 이종구와 다른 사람임이 분명한 사례도 있지만 판단하기 어려운 사례 역시 존재한다. 평안남도 관찰부 주사 李種九와 하동의 李鍾龜가 동일인물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사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으며, 만약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면 후자의 행적을 전자의 그것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