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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은 Mar 19. 2022

자전거를 그리워한다

  자전거를 오래 탔다. 

 지금은 아줌마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이 타고 다니시지만 이십오륙 년 전엔 청소년들이나 유행처럼 타고 다니는 게 자전거였다. 아들애가 중학생이 되면서  성인용 큰 자전거로 갈아타니 그전에 타고 다니던 살짝 사이즈가 작았던 빨간 자전거가 내 차지가 되었다. 짧은 내 다리에도 얼추 만만했던 크기라 어찌나 좋던지. 그 자전거를 거의 이십 년 가까이 탔다. 


 어디든 타고 다녔다. 은행 갈 때도, 미장원에 갈 때도, 장 보러 갈 때도. 한강을 따라 강남까지도 가봤고 10킬로 떨어진 백화점에도 가봤다. 생수 2리터짜리 여섯 개 팩을 두 세트까지 실어 보기도 했고 뒷 짐칸이 넘치면 양쪽 핸들에까지 무거운 비닐봉지를 매달고 달려 보기도 했다. 너무 무거운 걸 핸들에 많이 걸고 다녀 균형 잡기도 힘들었고 이게 부러지면 어쩌나 걱정했던 적도 있었다. 안양천을 넘어갈 땐 차도가 가팔라 오를 수가 없어서 어깨에 둘러 매고 걷는 사람용 육교를 올라가기도 했고 비가 올 땐 우산을 목과 어깨 사이에 끼고 달리기도 했다. 


 여름에는 쌩쌩 달려 바람을 맞으니 시원하다 생각했고 겨울엔 마구 달리니 땀이 나 따뜻하다 생각했다. 어느 겨울엔 영하 17도 속에 큰길을 마구 달려 돌아다녔는데 나중에 올케 전화를 받았다. 

"형님, 왜 그러셨어요? 준엽이가 너무 추워 도저히 놀 수가 없다 해서 차 태워 나가다 보니 형님이 자전거 타고 막 달려가시더라고요. 준엽이가 고모 이 추운데 어떻게 하냐고 걱정했어요"  

 

 처음 자전거를 탄 건 국민학교 3, 4학년 정도였을 거다. 그땐 1시간에 몇 십원 받고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이 있었고 어렴풋한 짐작으로 아빠한테 타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땐 자전거를 타는 여자애가 잘 없었는데 난 동전만 생기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쏘다녔다. 그걸 본 아빠는 내 자전거를 사주마 하셨는데 근처에는 파는 곳이 없어 버스 타고 30분 정도 떨어진 곳까지 날 데려가 맞는 걸 골라 주셨다. 문제는 배달이 안 되었다는 것. 좀 고민을 하신 아빠는 너 혼자 버스 타고 집에 가겠냐 하시고는 아빠가 그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갈 테니 먼저 가거라 하셨다. 어린 생각에도 키가 큰 아빠에게 그 자전거는 너무 작아 보였고 집까지 거리도 너무 멀었다. 창피하게 어찌 타고 오시려나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집은 700미터가 넘는 터널 옆에 있었는데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오시려면 그 터널을 지나 오셔야 했다. 버스를 타고 먼저 집으로 돌아와 속이 탄 나는 그 터널 앞으로 나가 목이 빠지게 아빠를 기다렸다. 속이 깜깜해 보였던 그 터널에서 아빠가 쏙~ 튀어나오던 장면을 난 아직 기억한다. 키가 훤칠했던 아빠가 작은 자전거에 어색하게 몸을 싣고 열심히 달려 나오시던.

 그때 아빠 표정은 부끄럽지도 힘들지도 않았고 야~ 이거 참 재밌다 하는 느낌이 가득이라 날 위해 저런 수고를 하셔야 했구나 하는 부담감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엄마는 저 지지배는 선머슴애처럼 저러고 다닌다고 뭐라 하셨지만 난 그 자전거로 온 동네를 싸다녔고 나중에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선 멀리 속리산 앞 큰길에서 난생처음 엎드린 자세로 타는 사이클이라는 걸 빌려 밤이 늦도록 오르락내리락 타고 다녔다. 

그렇게 오래 타고 다녔는데 이 사진 딱 한 장에 찍혀 있던,   아들과 나의 빨간 자전거

 그 뒤로 입시을 앞두게 되면서 더 이상 자전거 탈 시간이 없었고 이십 여 년이 흐른 뒤 애 엄마가 되어서야 다시 자전거 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줄창 돌아다니다 몇 년 전 건널목에서 넘어져 다리를 부러 뜨렸다. 그전에도 운동화 끈이 풀려 체인에 감기면서 속절없이 넘어지기도 하고 핸들을 틀다 미끄러진 적도 있지만 워낙 조심히 타서 크게 다친 적은 없었는데 건널목에 서 있던 할머니들 놀라실까 봐 속도를 급하게 줄이다가 넘어지면서 왼쪽 다리가 심하게 골절이 되었다. 


 지나가던 고마운 사람들이 119를 불러 주고, 자전거를 근처 전봇대에 묶어 주고, 앰뷸런스에 실릴 때 손도 잡아 주고 (아가씨였다 ㅎㅎ), 수술도 잘 받았지만 한쪽 다리를 통 깁스하고 두 달 가까이 고생해야 했다. 엄마한테 죽어라 욕을 먹고, 살림 뒷감당 때문에 여동생이랑 남편 고생도 많이 시켰지만 그 다리 가지고도 혼자 샤워하고 청소기도 밀고 방도 닦고 빨래도 널며 할 것 다 하고 지냈다. ('깁스 한 체 샤워하고 살림하는 팁' 이런 글도 써볼까 심각하게 셍각했었는데 별로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참았다)


 깁스 떼고 일 년 후에 철심 빼는 수술을 받고 나니 다시 자전거 타기가 숙제가 되었다. 전봇대에 묶여 있던 자전거는 동생이 가져다주었는데 집 앞 거치대에 묶어 두고 오가며 바라보기만 했지 탈 엄두가 안 났다. 그러다 어느 날 자전거가 없어져 버렸다. 수위 아저씨께 물어보니 당황해하시다가 다른 자전거를 구해주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알고 보니 안 타는 것 같은 낡은 자전거들을 모아 아는 고물장수에게 내주신 것. 지금은 관리사무실에서 정기적으로 안 쓰는 자전거를 미리 공지하고 수거해 처분하는데 그땐 그런 제도가 없으니 거치대는 모자라고 낡은 자전거는 넘쳐 아저씨가 임의로 그리 한 것이었다. 


 그 오랜 시간 많은 사연을 같이 했던 녀석을 허무하게 보내 버리고 몹시 섭섭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물어내라 할 수도 없었다. 가끔 저 녀석을 탈 수 없게 되었을 때 어찌 처분할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면 도저히 내 손으로 버릴 엄두가 안 났는데 차라리 그렇게 남의 손을 빌려 헤어지게 된 게 다행이다 억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속이 쓰린다. 얼마나 허망하게 쓰레기처럼 실려 갔을까.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오래 고민하다 동네에서 버린다는 자전거를 받아 다시 타 봤다. 참 좋았다. 괜찮구나, 안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좋았다. 좋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예전의 그 기분이 나질 않았다. 그만큼 신이 나지도 않았고 멀리 갈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몇 번 여기저기 타고 다니다 다시 묶어 놓고 그만둬 버렸다. 


 한 번 크게 혼이 나서 그런 건지, 나이가 들어 겁이 많아진 건지, 빨간 나의 자전거가 아니라 그런 건지 모르겠다.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전거를 타고 느긋하게 지나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이상하게 다시 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딱 이맘때 빼고는. 


 봄, 아직은 차가운 기운 속에 살짝 섞여 드는 따뜻함을 알아채게 되는 이즈음이 되면 난 자전거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타이어 공기 조임쇠 끼우고 바람 팍팍 넣고

 그리고

 그리고는 

 자전거에 올라타고 한 바퀴 도는데

 아~~~~~~~~~~~~~~~~~~~~~~~~

 정말 좋았다. 정말 정말 좋았다.


 찬기가 싸악 가신 바람도 좋고 맑은 하늘도 좋고, 바람 빵빵하게 새로 넣은 타이어 느낌도 좋고, 어쨌든 

다~~~~~~~~~~~~~~좋았다.


  십분 달려 일 해결하고 집으로 가는 길만 남았는데 그냥 자전거에서 내리기 싫어

  동네를 돌고 돌고 또 돌고.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저 아줌마가 실성했나? 했을 꺼다.

 혼자 히죽거리며 계속 돌아다녔으니.

 그럼 어때!


 자동차 운전도 재밌지만 역시 자전거가 최고다.

열다섯 살 먹은 낡은 녀석인데 역시 우직하고 정직한 기계답게 가끔 손만 봐주면

으레 그런 거지 하면서 한결같이 열심히 달린다.


12년 전, 그때 하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찾아보니 딱 이맘때 썼다. 그러니까 이게 고질병이었나 보다. 봄바람이 불 때면 흔들흔들하는~~~


덧.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두 손 다 놓고 자전거 타기였는데 끝내 해보질 못했다. 한 손으론 잘 타고 다녔는데 두 손 다 놓는 건 못해냈다. 조그만 녀석들이 팔짱을 끼고 두 다리로만 날씬하게 자전거를 타면서 방지턱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걸 보면 침 흘릴 만큼 부러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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