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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은 May 16. 2024

쇼펜하우어 때문에


 쇼펜하우어가 핫하다 하더니 철학강좌 첫 시간도 바로 저 꼬장할배로 보이는 비관주의 철학자가 주인공이였다. 내 기준으로는 칸트나 헤겔같은 사람이라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강사인 철학교수님은 다른 점에서 이 강좌가 의외였다고. 낮시간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철학강좌를 하는 게 더 신기하다 하였다. 이 동네는 처음 와 보는데 이런 강의가 추가 의자까지 넣어야 할 정도로 인기 있다는 게 놀랍다고.

 

 나도 접수 시작하는 날짜는 물론 시간까지 알람을 설정해놓고 5분 전 대기했다 바로 등록을 했다. 조그만 지역도서관 강좌라고 우습게 보면 안된다. 지난 겨울에 있었던 클래식 음악에 관한 강의도 정말 좋았다. 젊은 강사가 네 번 들려 주었던 음악사는 지루하지 않고 뻔하지도 않아 한시간 반씩을 음악에 푹 빠질 수 있었고 뭐랄까 좀 수준있는 사람이 된 것도 같은 착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즐거웠다. ㅋㅋㅋ 더구나  마지막 강의, 현대 음악에선 소음으로만 생각했던 선입견을 날려 버리게 다양한 작곡가와 곡을 소개해 주었다. 특히 윌리엄 볼컴의 <우아한 유령> 은 멜로디가 금방 귀에 익게 아름다웠다. (궁금하신 분은 클라라 주미 강과 손열음이 같이 한 연주를 보시라)

다시 철학으로! 


 쇼펜하우어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참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내 시대에 쇼펜하우어는 철저한 비관주의였으나 정작 전염병이 돌았을 때 죽음이 두려워 누구보다 먼저 다른 곳으로 도망간 사람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게 다! 였다. 살짝 B급으로 생각했던 이 철학자가 이 시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폐부를 찌르는 말을 잘 했기 떄문이라고 방송에서 주워 들은 적은 있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만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보는 만큼의 세상을 보면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슴도치와 같다. 너무 가까이 가면 찔린다. (이건 나의 막내이모가 해준 얘기기도 하다)

-모든 욕망은 채워질 때마다 더 큰 갈증을 느끼게 한다.

 

 검색창에 쇼펜하우어를 넣으니 명언이라는 제목이 주르륵 떴다.  강사는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어필하는 모양이라고.  그러나 강사에게 이 철학자의 뛰어난 점은 그 시대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동양 철학 특히 인도철학과 불교에 신뢰를 두었다는 거란다. '세상은 고해의 바다, 고해의 원인은 욕망'이라는 불교의 세계관이 쇼펜하우어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그런데 한 개인이, 업적과는 별도로 자신의 주장을 실제 얼마나 실천하고 살았는가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닥 이 철학자의 주장이 와 닿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잘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마를 아주 싫어하고 괴롭혔던 사람. 그런 아들을 피해 다른 도시로 도망간 엄마를 악착같이 따라가 엄마의 사교모임에서 힐난하고 꼬장을 부렸던 사람. 뿐만 아니라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세상에 화를 품고 살았던 사람. 내가 예전에 읽던 쇼펜하우어 전기에서의 일화속에 보여진 것은 도대체 이해 불가의 꼴통 캐릭터였으니. 


 그렇지만 철학교수의 입장에서 설명해주는 이 철학자의 세계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첫날 강의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흩날리는 벚꽃잎 (이 강의는 3월말에 있었으니) 아래 혼자 걷다가 문득 아, 쇼펜하우어! 하고 머릿속에 새삼 번쩍하고 불이 켜졌다. 아! 그 쇼펜하우어!


 사십 년 쯤 전, 남편을 몇 번 만났을 때 이 남자가 느닷없이 쇼펜하우어 이야기를 했다. 난 그때 요즘말로 하면 남사친이 많았는데 얘네들이 마르크스니 니체니 헤겔, 부버 등등 온갖 철학자 얘기를 하며 잘난 척 하는 걸 귀에 피가 나게 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한 번도 쇼펜하우어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천재라고 불렸는데 그 엄마도 만만치 않았대. 쇼펜하우어가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을 때 그 친구가 쇼펜하우어 엄마를 보고 당신 아들은 천잽니다 하니까 그 엄마가 '내 집에 천재는 나 하나로 충분하다'면서 발로 차 쇼펜하우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대." 

'쇼펜하우어가 밥을 대놓고 먹던 식당에 군인들도 밥을 먹었는데 쇼펜하우어가 밥을 먹을 때마다 탁자 위에 금화 한 닢을 놓았다가 다 먹으면 다시 호주머니에 넣곤 했대. 계속 그러니까 식당주인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저 군인들이 밥 먹으면서 여자이야기를 하루라도 안 하면 이 돈을 기부하려고 했는데 여태 그런 일이 없었다 했대."

 이런 얘기말고도 이젠 널리 알려진 헤겔과의 강의 대결이며 끼고 키운 강아지얘기까지 여러 에피소드를 줄줄 늘어 놓았다. 


 난 그때 정말 놀랐었다. 잘난 내 친구들도 모르던 마이너 철학자를 알고 있다니, 더구나 그 철학 세계를 넘어서 가십거리 정도밖에 안 되는 개인사까지 알고 있다니 이 사람 대단한 독서가구나 했다. 그때까지 가볍게 생각했던 사람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런 이런 이런!


 나중에 알았다. 남편은 철학책은 물론 그 어느 책에도 별로 흥미가 없었으며 내게 들려줬던 쇼펜아우어의 일화도 우스꽝스러운 행동만을 모아 엮어 놓은 책에서 읽었다는 걸. 


 비장하고 아름답게 흩날리는 하얀 꽃잎 속을 걸으면서 제 꾀에 혼자 넘어간 내가 우스워, 그것도 저 꼬장 할배 이야기에 넘어간 내가 우스워 길 위에 쌓여 바람에 우르르 몰려 다니는 꽃잎에 발길질하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내가 생각해보니 쇼펜하우어한테 속아서, 아니 당신한테 속아서~~" 하니까 전화 속 남편이 '아이구 고마좀 해라~ 그게 언제쩍 얘긴데' 한다. 


 '욕망을 이성에 맞춰 설득하려 하지 말고 이익에 초점을 맞춰 말하라.' 

 

그날 강의 중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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