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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Mar 17. 2023

바닐라 라떼로 마실게요.
따듯하게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로 자신을 지키고 있나요?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취약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중 하나는 파랑에 끌린다는 것이다. 첫 책 <퇴사 사유서>의 표지에 파란색을 사용한 이유도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블루’하다. 영어에서 ‘I feel blue’라는 표현은 기분이 울적하거나 우울하다는 표현이다. 맞다. 나의 취약점은 우울에 있다. 나는 일상에서 종종 우울을 마주하곤 한다.


보통 짜증에서 불안으로, 불안에서 걱정으로, 걱정은 우울을 데려온다. 내가 겪는 우울은 어떤 느낌이냐면 앞으로 내 일상과 미래에 희망이 없어지는 느낌이다. 내가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무엇을 하든 실패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그런 종류의 우울이다.


몇 번은 우울 속으로 깊게 가라앉은 적도 있었는데, 우울의 깊이가 깊을수록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는 건 그만큼 더 힘이 들고 어렵다. 너무 깊으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올라오기 힘들기 때문에 영영 우울 속에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보다 위험한 이 감정 때문에 몇 번 고생해보니 습관적으로 일상에서 내 우울 지수를 체크하게 되었다. 다행히 요즘에는 봄이 다가오는 기운 때문인지 우울함이 찾아오지 않았다. 꽤 기분 좋은 일상을 보내는 요즘이다.


바로 이번 주 직전까지.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오랜만에 우울과 대면했다. 이번 주는 많이 가라앉았다. 마치 파도를 타다 물에 빠진 파란 바다의 서퍼같이. 


문제는 프리랜서 일에 있었다. 12월까지 괜찮았던 의뢰 숫자는 곤두박질쳤지만 계속해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일감을 찾아 나섰었다. 두 달을 넘게 극진하게 예비 클라이언트를 상담해주고 서비스와 가격도 개편하는 노력을 들였지만, 매출은 올라가지 않았다.

“디자인 기획부터, 컨셉이랑 레퍼런스 찾는 것까지 모두 해드리겠습니다. 의뢰자님은 들어갈 내용만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


 “내용도 제가 정리해야 하나요? 디자이너님이 정리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일이 쉬워 보이는데 가격 좀 더 깎아주세요.”


 “내용 정리는 해드리겠습니다. 다만 가격을 깎아드리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마세요”


가격도 내리고 서비스 범위도 넓혀 상담했지만 두 달 동안 반복된 ‘거절’에 나의 용기마저도 사라지고 있었다. 예비 클라이언트들은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나에게 싫어하는 것 투성이었다. 마치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일감을 따내지 못하는 내 잘못. 공짜로 일해주지 않는 내가 미련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주는 종일 상담에만 매달렸다. 내가 더 친절하게 ‘노력’해서 일감을 따내겠다는 ‘용기’가 작게나마 있었기 때문이다. 숨고에서 예비 클라이언트에게 상담해주는 비용으로 5만 원을 썼고, 크몽에서는 상담 요청을 더 받으려고 10만 원어치의 광고도 신청했다. 하지만 내 용기와 노력을  비웃으며 ‘실패’는 나에게 또 한 번 ‘실패’를 주었다.


제대로 일감을 따내 보겠다며 그나마 있던 작은 용기를 내었고 이번 주 내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실패’라는 친구는 나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마도 일감이 줄어든 후부터 쌓여온 노력의 피로와 계속된 실패도 한몫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두 달 동안 실패를 만나면서 처음에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가 짜증이 났고,  점점 일감이 사라져 불안했고, 그러다 바닥을 보이는 통장 때문에 겁이 났고, 결국 나는 불행할 나의 미래를 생각하며 한순간 우울의 바다에 빠져버렸다.


우울했다. 앞으로 일감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 가난과 고독에서 실패와 영원히 살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 기분을 이전에도 여러 번 느꼈었다. 이상하게 이 기분에는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실패와 절망이 영원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러던 와중 나는 따듯한 바닐라 라떼가 마시고 싶어졌다.


따듯한 바닐라 라떼를 생각하는 건 우울한 기분을 겪는 나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곧장 옷을 챙겨입고 내가 좋아하는 동네 카페로 발 빠르게 향했다. 어둑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카페에 들어서니 머리가 짧은 사장님이 나를 반겨주신다. “오셨어요! 오늘 날씨 참 좋죠? 아침에 비가 왔는데 해가 뜨니까 기분이 좋은데요!” 사장님은 내 기분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상냥하고 특유의 넘치는 에너지로 나를 반겨주셨다. 이 카페 사장님만 보면 뭔가 힘이 나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바닐라 라떼로 마실게요. 따듯하게요.”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바닐라 라떼를 결재한다. 그럼, 사장님은 어김없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자리로 가져다드릴게요!”라고 말씀하신다. 사장님의 힘찬 목소리가 가라앉은 내 기분을 조금 위로 끌어당긴다.


사장님이 만들어주신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셔본다. 따듯하고 달콤한 커피가 내 몸에 들어온다.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 때문인지 아니면 바닐라 시럽에 들어있는 당 때문인지 가라앉았던 내 기분이 조금씩 올라오는 걸 느낀다. 창가 자리에 앉은 나는 창밖으로 오후에 뜬 햇빛을 바라본다. 풍경이 따듯하다. 그리고 책장에서 무심코 가져온 책을 펼쳐본다.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화자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자신을 지켜내는 일을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희망으로 또 채워본다. 오후 몇 시간을 그렇게 보내니 기분이 점차 나아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실패’로 사라져버린 희망이 조금씩 돌아오는 걸 느낀다. 어쩌면 나는 잘될지 모르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다. 무엇이든 해봐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따듯한 바닐라 라떼를 마시고 책을 읽는 건 깊은 파랑의 바닷속에 가라앉고 있는 나에게 해수욕장의 구조 튜브 같은 것이다. 가라앉는 나를 위로 끄집어내는 구조 튜브. 다행히 구조 튜브 덕분에 우울하게 가라앉고 있던 기분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다시 수면 밖으로 나와 일상의 파도에 올라탈 수 있었다. 다시 일상에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16살 때 우울을 처음 느끼고 일상에서 종종 우울함이 스멀스멀 찾아오곤 한다.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았지만, 이것도 몇 번을 반복해서 느끼다 보니 나름대로 스스로를 파랑의 바다에서 꺼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카페 가서 따듯한 바닐라 라떼 마시기, 달달하고 맛있는 디저트 먹기, 확 트인 공원에서 오랫동안 음악 들으며 산책하기, 샤워하고 가까운 서점에 가서 책 읽고 고르기, 가족에게 전화해서 위로받기 등 내가 행복해지는 일들을 조커 카드처럼 사용해 우울에서 스스로를 끄집어낸다. 대부분의 경우 꽤 효과적이다. 이번 주도 마찬가지로 파랑의 바다에 가라앉는 나에게 구조 튜브를 던졌다. 다행히 또 올라왔다. 희망이 생겼다. 희망이 생기고 난 후에 나는 프리랜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앞으로의 플랜 B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했고 몇 가지 대응책을 마련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있으니 내가 좀 더 든든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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