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진 Sep 05. 2022

어쨌든 출발

완벽한 계획이란 어차피 없을 테니

D-1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기 하루 전이다. 근 삼 년 만에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내 하루 전 기분은, 오랜만에 설렘,이어야 하는데 그게 영 그렇지가 않다. 몸과 맘 둘 다 준비가 덜 된 기분이랄까. 몇 달 전부터 아프던 곳도 여전히 말썽이고, 엄마를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도 아직 큰 상태라 더욱 그런 듯하다. 몸의 문제는 항생제를 잔뜩 준비해서 대비했지만 맘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막내 누나의 간절함을 동력 삼아 함께 순례길로 향하기로 하고 서둘러 항공편을 예약한 게 벌써 석 달 전이다. 그때 우린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아 어쩔 줄 몰랐다. 우리만의 일방적 짝사랑이라기보다 마치 이 길도 우리를 기다리면서 안달을 내는 것처럼 느다. 특별하기에 이름도 붙여줬다.  

 '까미노 프로젝트 : 까미노의 얼굴들'


 좀 뻔해 보였지만 이름을 짓고 불러보니 이 순례길이 나와 누나라는 경계를 넘어 조금은 더 크고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우린 이 순례길이 우리들 각자의 질문을 응시하고 성찰하는 개인적인 경험에 더해 바깥으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경주하듯 걷지 않고 쉬엄쉬엄 걸어 뒤처지는 것이 첫 번째 계획이다. 느리게 걷다 보면 자세히 보게 되고 자세히 보이는 것들엔 풍경만 있는 게 아니라 길 위의 얼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꾸준히 느리게 걷다 보면 매일, 적어도 이삼일마다 길 위의 얼굴들은 새롭게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들 프로젝트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즉, 천천히 뒤처져 걷다 자세히 만나고 들여다보게 되는 수많은 새로운 얼굴들과 인터뷰를 하고 가능하다면 인물 사진을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가능하다면 귀국 후 모 인터뷰 자료들을 가지고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책을 출간해 볼 계획을 세웠다. 가슴이 뛰고 웅장해져 버린 까미노 프로젝트였다. 흥분과 기대감을 애써 숨기지 은 채 석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해보자고 우린 서로를 독려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일찍이 현자(者)처럼 영화 기생충 속 송강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라고. 잘못될 일도 실망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우린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안으로 진입하기도 전에 벌써 계획은 틀어졌다. 아니, 계획이 틀어졌다기보다, 그 계획 안에서 서사를 써 나가고 결과를 만들어 나갈 캐릭터들이 휘청댔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앞에 직면한 우리가 계획 속 캐릭터로서 이전과 같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애시당초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다. 그래서 까미노 프로젝트는 유효한 거냐고? 까미노의 얼굴들은? 쎄다, 잘 모르겠다. 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순례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가장 먼저 인터뷰장으로 불러 세우고 들어보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자신들의 것이 돼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거냐고, 어떤 질문을 품고 있냐고. 그래서 엄마와는 어떻게 이별할 것이냐고......


D-day


 엄마가 자주 끼셨던 반지를 실에 묶어 목에 걸고 비행기를 다. 그리고 경유까지 포함해 장장 24시간에 걸친 고행에 가까운 비행을 마치고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오늘 들어섰다. 순례길의 첫날은 아니지만 어쨌든 디데이로 하자.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 출발, 걷기, 이 모든 것이 다 같이 디데이인 걸로 하자.  이삼일간은 시차에 적응하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면서 천천히 시간을 흘려보낼 생각이다. 그리고 사흘 뒤 산티아고 순례길 중 하나인 프랑스길을 걷기 위해 생장이란 곳으로 들어설 것이다.

 신나게 길 위의 얼굴들에게 마이크를 채워주며 당신의 인생에서 건져 올린 속 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제발 들려달라고 조를 생각이었다. 속깊지도 않고 감동이 없더라도 잘 포장해서 그럴싸하게 뽑아낼 생각도 있었다.

 이젠, 생각이 없다. 그러니 계획도 뭉개졌다. 내가 쉬 답하지 못하고 끌고 온 인생의 문제들이 이렇게나 생생하고 버거운데 마치 내가 예수라도 되는 양, 고달픈 네 십자가를 잠시 내게 맡기라는 듯 마이크를 옷깃에 채워줄 자신이 없다. 그건 말 그대로 이벤트이자 금세 사그라들 성령 충만 부흥회일 뿐.


 다만, 다가오는 길 위의 얼굴들이 전해주는 진심들이 내게 들린다면 들어보겠다. 그리고 내 이야기도 함께 천천히 들려주겠다. 계획이라서가 아니라, 슬픔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그저 온전하게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함께 공명하고 싶을 뿐이다. 위로나 공감, 이해와 조언이 아니라 우리들이 이렇게나 각자의 진심으로, 각자의 슬픔으로 다르구나, 외롭구나, 하고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거면 될 거 같다.

그걸로 까미노 프로젝트는 시작과 완성이 함께할 거 같다. 십자가를 스스로에게 지워주고 그 십자가로부터 해방되는 계획이 아닌, 내가 나 자신이었던 순간을 기억해보는, 당신이 당신 자신일 수 있는 순간을 응원해주는 까미노를 하루하루 걷는다면 그걸로 됐다 싶다. 미련하게 미련 따위 남길 일도 없다.


어쨌든, 드디어, 꾸역꾸역 시작합니다, 부엔 까미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