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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스플X미래의창]


나는 왜 내 마음이 버거울까
정신과 의사 캘선생의 상담소
-유영서-


"선생님,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요? 제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가끔 말문이 막힙니다. 왜냐하면 ‘의미’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함 때문에 그래요. 내담자가 말하는 ‘의미’는 어떤 뜻이 있을까, 그 단어의 정의에 대해 어떤 답을 듣고 싶어 할까? 저 혼자 고민합니다. 어쩌면 제가 선택과 지시를 대신해 주길 바라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저는 거꾸로 물어봅니다.


“본인이 말하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보았을 때 의미에 대한 토론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간 이후로 끊임없이 지속되지 않았나 싶어요. 철학자들도 의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일반인들이 스님한테 '스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질문하는 것을 보면 고통과 행복이 겹쳐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애타게 찾아다니나 봅니다.



<나는 왜 내 마음이 버거울까?> 책 속 문장으로 이번 글을 시작해 보았어요. 여러분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의 삶의 의미도 궁금한데요. 만약 지금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진다면 선생님의 진료실에 방문한 내담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아랫글을 읽어보세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나에게 의미가 '성취'에 가깝다면


저는 다수의 내담자가 ‘의미’라는 단어를 ‘성취’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제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겠어요”라는 말은, “가시적인 무언가를 이루어 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가 이 반복적이고 벗어날 수 없는 일을 계속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겠습니다. 내담자의 질문 의도가 성취에 있다면 아쉽게도 저는 대답하기 어렵겠네요. 저는 정신과 의사이지 점쟁이는 아니니까요.


아주 많은 경우 성취를 이뤄내면 그제야 자신이 행해왔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거꾸로 과거의 사건에서 의미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축구 경기 중계를 예로 들어 보자고요. 중계 중에 골이 들어가면 그 골이 만들어진 과정을 여러 번씩 리플레이 해줍니다. 여러 번의 패스 끝에 공격수가 골을 넣었다고 해서 그 모든 패스가 의미를 품고 진행된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겠어요. 골이 들어갔으니 필요했던 패스가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로 인해 언젠가 달콤한 성취를 맛보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지루한 시간도 알고 보니 아주 큰 의미를 품었던 시간으로 재발견될지도요.





나에게 의미가 ‘큰 뜻’에 가깝다면


호방한 뜻을 품고 인생을 사는 것은 참 멋지죠. 저도 종종 위인전이나 자기 계발서를 읽거나 매체에서 누군가의 각색된 멋진 성공담을 보면서 ‘나도 저런 큰 뜻을 품고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느 정도는 앞서 말한 성공한 사람들의 성취한 지점에서부터 거꾸로 만들어 간 의미는 아닐까요? 위인들도 처음부터 그런 어마어마한 뜻을 품었을까 싶은 의문이 들어요.


물론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지’, ‘몇 살 안에 어떤 수준 이상의 성취를 올려야지’, ‘풍요로운 삶을 이루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같은 마음속 모토를 만들어 두는 것도 좋긴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진심이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을 갉아먹고 불 안에 가두는 또 하나의 잣대로 변질하기도 해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간에 그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는 문장을 피곤하게 하루 종일 품고 살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고 묵묵히 준비하는 사람들이 특출난 큰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보다 더 많다고 봅니다.



그리고 ‘큰 뜻’이라는 것 자체에 함정이 있습니다. ‘큰 뜻’이라는 말은 맹신하기 쉬워요. 너무나 옳은 것처럼 느껴지는 문장은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개인적인 뜻을 위해 자신 외의 사람이 누리는 안온한 삶을 희생시키려 하기도 합니다. ‘내 생각이 맞는데, 이건 이렇게 돼야 하는데. 왜 나는, 그리고 당신은 그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 같은 협소한 시각이 생기기도 하고요. 삽시간에 당신의 좋은 의미에 맞지 않는 모습과 상황들은 모두 그 자체로 의미 없는 일이 돼 버리는 아주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런 ‘의미’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의미를 찾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혹시 의미 없는 삶이 '낙이 없는 삶'인 건지


그것보다 저는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내담자가 그 일에서 대단한 성취를 찾거나 큰 뜻을 원한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일을 하면서 낙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일이 재미있으려면 어느 정도 성취나 보상이 있어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맥락이 아주 다른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아쉽게도 성취와 보상의 순간은 매번 일어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라고 쓰고 ‘재미’라고 읽는 일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바로 우리의 뇌를 다시 한번 속여보는 겁니다. 큰 재미 대신 잔재미를 찾아가면서요.


그날의 의외성을 하루에 하나씩 끼워보는 겁니다. 저의 경우 팍팍한 레지던트 생활 동안 캐릭터 인형 머리가 달린 우스꽝스러운 펜을 가운 주머니에 끼워 두고 다니곤 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을 지나다니면서 누가 그것을 알아보는지 속으로 저 자신과 내기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인형 머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저에게 말을 거는 의외의 순간들은 제 나름의 즐거움이 됐습니다. 가끔 서류에 사인할 때 우스꽝스러운 펜을 꺼내거나 누군가 펜이 필요한 순간에 그 펜을 건네며 재미를 찾는 거죠. 펜을 보며 상대가 웃어버릴지 당황할지 지켜보는 일도 저에게는 하루의 소소한 잔재미였습니다.



의미를 이야기하는데 갑작스레 잔재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의미가 성취가 됐건, 큰 뜻이 됐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오늘의 소중한 시간과 명랑한 기분을 낭비해가면서까지 기필코 찾아내야 하는 물건은 아닐 거예요. 다가오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추려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중요하지만 매일 하는 일에까지 특출난 의미와 미션을 붙이고 기준을 두며 나 자신을 두 번 힘들게 하는 일은 가끔은 미련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언젠가 찾을지도, 영영 알지 못하게 될지도, 아니면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상한 형태로 성취라는 녀석을 손에 쥘지도 모릅니다.






'번아웃 증후군' 들어보셨나요? 게으름과는 조금 다른 의미인데요. 번아웃 증후군은 어떤 직무를 맡는 도중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직무에서 오는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증상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아실현의 욕구, 인정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정과 성취감을 통해 이 욕구들을 충족 시키게 되는데요. 반복되는 삶 속에서 매 순간을 열정적으로 살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오늘 전해드린 <나는 왜 내 마음이 버거울까?>를 통해 인생의 작은 의미를 찾는 방법, 조금 작은 목표를 달성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워보면 어떨까요? 누군가 "사람은 왜 사는 걸까요?"라고 묻는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작고 큰 모든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삶' 아닐까요?"라고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스파크플러스와 미래의창이 전해드리는 읽고 싶은 책 소개, 다음 이야기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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