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를 정독하는 이유

by 날큐

나는 추천사를 정독한다.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읽는다. 이때만큼은 평소 ADHD가 의심될 정도로 산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양피지에 필사라도 하는 양 중세시대 수도사들과 같은 고도의 집중력을 보인다. 어찌 보면 경건하기까지 하다. 가끔은 과도한 주의를 보인 나머지 막상 책의 본론으로 들어갈 때는 힘이 빠지기도 한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오조준된 나의 집중력은 추천사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띠지에서부터 작가의 프로필에 이르기까지 책에 대한 우호적인 문구라면 무차별적으로 포함한다. 사실 애피타이저에 대한 나의 집착은 본격적인 식사를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퇴사한 마흔은 의심이 많았고 독서의 효용은 의문스러웠다.



독서는 묘한 활동이다. 정체성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책은 독서를 하는 주체와 목적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 가령 같은 소설이라도 편집자가 수정을 위해 읽는다면 일이요, 작가 지망생이 참고할 요량으로 읽는다면 학습이요, 직장인이 휴식을 위해 읽는다면 놀이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이다. 나의 상황은 더욱 애매했다. 아내와 벌인 사업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으나 코로나 위기를 맞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덕에 나는 해야 할 실무가 줄며 반백수 처지가 되었다. 남는 시간을 활용해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아직은 브런치 작가에 만족하고 있다. 글은 쓰지만 작가라고 말할 수 없는 나의 심정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할 수 없는 홍길동의 처지에 비해 나을 것이 없었다.



이토록 애매한 둘이 만나 그동안의 커리어와 바꾼 금쪽같은 시간을 쓰려니 의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나는 마치 검사라도 된 듯 스스로에 대해 심문했다. '내가 독서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회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게 자기기만인가?' '그렇다면 나는 쓰레기인데?' 자기 심문은 점차 과격해졌고 생각은 점점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검디 검은 의심의 물방울 하나가 새하얀 내 머릿속을 검게 물들이며 나는 검은 쓰레기가 되기 일쑤였다. 의심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끄집어내 줄 메시아가 필요했다. 이때 추천사가 나타나 나를 구원해 주었다. 추천사는 마치 사이비 교주라도 된 듯 책에 대한 믿음을 주입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신의 게시라도 받은 것처럼 "할렐루야"를 외쳤다.



간증의 시간이 지나면 독서는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놀고 있다는 의심은 적어도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안심으로 독서를 일로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바뀌어갔다. 책의 위상이 올라가며 책을 읽고 있는 나의 지위도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백수였던 내가 작가지망생을 넘어 미래를 고민하는 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역시 명분을 확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권위에 기대는 것인가 보다.



용기를 얻기 위해 추천사를 읽기 시작했지만, 읽다 보니 그 밖에도 꽤 흥미로운 점들이 있었다. 우선 문장 자체가 유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추천사는 주로 저명인사들이 쓴다. 그들은 대부분 글쓰기에 능하고 심지어 베스트셀리 작가인 경우도 많다. 게다가 수백 페이지에 대한 감상을 단 몇 줄로 표현해야 하니 생각은 응축되고 표현은 단단해진다. 가끔은 추천사로 쓰기엔 아까운 참신함을 보이기도 한다.



같은 내용을 보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저마다 생각의 지점이 다르다. 책은 한 권 전체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부분으로서의 가치도 있는 듯하다. 이것이 특정 문구 하나가 인생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나보다 나은 - 적어도 낫다고 생각되는 - 사람들의 관점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이 결정된다. 가끔은 괜찮은 포인트를 발견하는데, '이런 게 집단지성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추천사를 통해 작가들의 관계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심 탈레브는 그동안 접한 작가 가운데 가장 까칠한 사람이다. 월가 사람 특유의 확신에 찬 어조를 접할 때면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저서 《블랙스완》에서 무려 플라톤과 가우스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유독 《생각에 관한 생각》의 저자인 대니얼 카너먼에게만은 우호적이었다. 의외였다. 이유가 궁금해졌다. 추천사를 다시 봤다. 역시나 제일 윗줄에 카너먼의 극찬이 있었다. 호기심에 카너먼의 책도 찾아보았다. 워낙 대단한 책이라 그런지 추천사를 위한 별도의 페이지는 없었지만 책 뒷면에 커다란 글씨로 쓴 나심 탈레브의 추천의 말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동급의 고전이다!" 그 까칠한 나심 탈레브가 추천사를? 그것도 느낌표를 찍어가며? 역시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이젠 더 이상 추천사가 필요하지 않다. 지난 몇 년간 책을 읽어오며 독서에 대한 신뢰가 쌓였고 자연스레 내 책장은 아직 읽지 못한 양서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추천사를 정독한다. 오랜 기간 읽으면서 습관이 된 건지, 마흔의 독서를 이어가게 해 준 고마움에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도 책을 읽을 용기가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추천사를 예찬한다. 나에게 있어 추천사는 일종의 토템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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