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들은 무언가를 모은다. 자동차를 모으는 배포 큰 아저씨부터 문구류를 모으는 소심한 아저씨, 돌멩이를 모으는 특이한 아저씨까지 행태는 다양하다. 저마다의 경제적 상황과 개인적 성향이 적당히 어우러진 결과이리라. 아저씨들의 모으기는 대개 취미가 변질되며 시작된다. 골프로 시작해서 퍼터를 모으고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를 모으고 낚시를 하다가 낚싯대를 모으는 식이다. 근원은 욕구불만이다. 꿈과 현실, 다시 말해 원대한 목표와 초라한 실력 사이의 간극을 무언가로 채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전문용어로 대리만족 - 정확하게는 대상행동 -이라 한다.
눈에 띄는 점은 주객이 전도된 지 오래지만 취미라는 명분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위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존하기 위해서다. 그도 그런 것이 아내들은 남편들의 모으기 활동을 끔찍이 싫어한다. 꼴도 보기 싫어한다. 이런 상황에서 취미라는 구실은 모으기 활동을 근근이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취미를 가장한 모으기 활동 중 가장 악질인 것 세 가지를 묶어 '남자 3대 악취미'라 한다. 이들에게는 '패가망신'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다. 아내들의 특별 관리 대상이기도 하다. 반면 남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소중한 활동이 이 카테고리에 드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자칫 백악기 공룡처럼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3대 악취미의 버전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카메라, 오디오, 자동차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전거, 낚시, 캠핑 - 캠핑은 언제부턴가 가족 활동으로 위장하며 3대 악취미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라 한다. 취미로 위장하기도 버거운데 영역마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중고다.
나도 무언가를 모은 적이 있었다. 아내가 상당히 인자했던 시절이어서 그렇지 요즘 같았으면 결혼도 못 할 뻔했다. 품목은 일렉기타였다. 기타 수집은 여느 아저씨들과 마찬가지로 취미에서 시작되었다. 기타를 잘 치고 싶었지만 실력이 안 따라줬다. 허접한 실력을 보완하기 위해 좋은 기타를 사고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더욱 좋은 기타를 사고 이 정도로도 안 되겠다 싶어서 더더욱 좋은 기타를 사고. 이런 과정을 몇 번 겪다 보니 기타의 가격은 이미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게다가 여러 대였다. 장르 별로 알맞은 소리가 있고 기타마다 사소하지만 분명히 다른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소리의 질감까지 따지다 보니 품격에 맞는 커다란 앰프를 구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신혼집 방 하나를 희생하여 방음부스까지 들여놓게 되었다. 이쯤 되니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냐?"
무언가를 다시 모으기 시작한 것은 주식투자 실패로 기타들을 모두 팔게 된 - 아내가 기억하기로 그날 밤 나는 개그콘서트를 보면서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 후로 처음이었다. 책도 모으게 줄이야. 발단은 책꽂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공간에 비해 독서 계획은 거창했기에 - 그땐 난독증에 가까운 내 책 읽는 속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책이 많이 들어가기로 유명한 회전식 책꽂이를 샀다. 그것도 원목으로. 그것도 두 개나. 처음엔 좋았다. 회전식 책꽂이 두 개가 서로의 모서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미 상당한 독서가라도 된 양 뿌듯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책꽂이의 빈 공간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책으로 채우고 싶었다.
이때부터 읽을 책이 아닌, 읽을 거 같은 책을 사기 시작하였다. 책꽂이는 빠르게 채워져 갔고 곧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이 많아졌으며 온라인서점 플래티넘 회원이 되었다. 처음엔 기껏해야 한두 권 더 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독서 경력이 쌓이며 책 사기 기술도 늘어만 갔다. 특정 작가의 책을 싹쓸이하기도 하고 책에서 추천한 책을 모두 사기도 하고 같은 주제에 대한 책을 여러 권 구입하기도 했다. 게다가 굿즈에 눈을 떴다. 신세계였다. 세련된 디자인에 가격은 어찌나 합리적인지. 굿즈를 갖기 위해 책을 사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서야 좀 자제할 수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안타까운 순간이 있다. 원하는 책이 절판되었을 때다. 중고로 사서 읽으면 되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보통 절판을 안타까워하는 수만큼 프리미엄이 붙기 마련이다. 유명인이 언급이라도 하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책도 재투자의 대상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내가 처음으로 산 절판본은 《벤자민 프랭클린 인생의 발견》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읽고 감동을 받은 터라 월터 아이작슨의 - 국내 발행된 - 책을 모두 사게 되었다. 그런데 한 권이 절판이었고 그 책이 프랭클린이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상태 좋은 책은 가장 저렴한 것이 정가의 3배가 넘었다. 자기계발에 평생 진심이었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책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책꽂이 상단에 위치하게 되었다. 요즘 물가를 감안하면 지금 나와도 그 정도 가격은 될 거라는 것이 작은 위안이었다.
그 후로도 내가 원하는 책들은 절판인 경우가 많았다. 마치 내가 절판된 책만 찾아다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런 것이 전기문은 열악한 국내 출판 시장에서도 비주류이다. 당연히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몇 년이 지나면 절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천재들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절판본을 구하는 일도 많아졌다. 그렇게 다윈, 리처드 파인먼, 반 고흐의 생을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아이작 뉴턴은 한정판인 데다가 절판이라, 그 위상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최근 이사를 하게 되면서 애지중지하던 회전식 원목 책꽂이는 모두 베란다로 쫓겨났다. 대신 새하얀 6단 책장이 내 책상을 둘러싸고 있다. 나는 여전히 그 책장을 책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약간의 우려는 있지만 책을 모으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그 자체로도 즐겁지만 독서에 꽤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 초기의 가장 어려운 점은 당장 눈으로 드러나는 성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사람들은 독서의 흔적을 남기려 한다. 누군가는 독서일지를 쓰고 다른 누군가는 SNS에 기록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엑셀로 도서목록을 관리하면서 말이다. 마찬가지다. 나의 욕망의 서재는 오늘도 흔적을 남기려 애쓰고 있다.
김영하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