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프랭클린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다이어리를 만든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는 미국 경제의 상징인 10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며 초대 대통령으로까지 거론된 적이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전직 대통령으로 오해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미국 건국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문서- 독립선언서,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문, 영국과의 평화 협정서, 헌법 -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다. 특히, 그의 자서전은 자기계발 분야에서 바이블로 불리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한 가지 더. 그는 '피뢰침'을 만든 발명가이기도 하다. 덕분에 그는 과학자로도 유명했으며 '번개를 다스린 자'라고 불리기도 했다.이 정도면 18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화려한 업적만으로도 프랭클린의 인생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겠지만, 그의 삶이 우리에게 유독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평범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정규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자칫 평범해 보일 수 있는 그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업적들을 이루어 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갖게 된다. 우리도 프랭클린처럼 될 수 있을까 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렇다면 프랭클린은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특기가 하나 있었다. 그의 무기는 그를 성공한 사업가로 만들어 주었고 사업에서의 성공은 그가 다방면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되어 주었다. 또한 그가 정치인, 외교가, 과학자 등으로 영역을 넓혀갈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이처럼 그의 인생에서 만능키였던 그의 장기는 바로 글쓰기였다.
이민자 가정에서 17남매 중 15번째로 태어난 프랭클린은 학업을 포기하고 형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조수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는 불합리한 도제 문화- 심지어 조수에게 채찍질까지 했다고 한다 -에 염증을 느낀다. 형과의 불화까지 겪으며 그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인쇄소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직접 인쇄소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프랭클린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인쇄소 두 곳으로 충분한 도시에 세 번째 인쇄소를 차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쟁사 두 곳 중 한 곳은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 당시 인쇄소들은 언론의 역할을 겸하기도 하였다 - 그곳의 주인인 브래드퍼드는 우체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모든 신문의 배급을 통제하고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비교적 손쉬운 상대인 키머가 운영하는 인쇄소를 목표로 한다.
프랭클린은 '참견쟁이(Busy-Body)'라는 필명으로 브래드퍼드가 발행하는 신문에 에세이를 기고한다. 물론 글의 타깃은 키머였다. 프랭클린 특유의 위트와 뼈 있는 유머는 따분한 신문에 질려있던 사람들에게 좋은 오락거리가 된다. 자신을 향한 조롱에 흥분한 키머가 응수해 보았지만 글로써 프랭클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키머의 인쇄소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결국 프랭클린에게 인쇄소를 헐값에 팔게 된다.
프랭클린이 가명으로 에세이를 기고한 것이처음은 아니었다. 형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할 때도 '사일런스 두굿'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형이 발행하는 신문에 몰래 글을 올렸다. 에세이 시리즈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뒤늦게 글의 주인이 프랭클린인 걸 알게 된 형은 동생을 질투하게 된다 - 형제간 불화의 시작이다 -. 키머의 인쇄소를 인수한 후에도 프랭클린은 똑같은 방식으로 브래드퍼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라는 신문을 직접 발행하며 결국 브래드퍼드를 제치고 도시의 가장 큰 인쇄소의 주인이 된다. 언론 권력의 핵심이었던 우체국장의 자리도 차지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의 글이 있었다.
일종의 격언집인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의 성공으로 큰 부를 거머쥐게 된 프랭클린은 마흔둘이라는 나이에 은퇴를 결심한다. 그는 인쇄소 경영을 지배인에게 넘기고 - 매년 발생한 수익의 절반을 받는 파격적인 계약을 맺는다 - 정치인과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요샛말로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그의 글솜씨는 정치생활에서도 도움이 된다. 사실 그는 좋은 연설가는 아니었다. 그의 스피치는 힘이 넘치거나 특별히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는 정치가로서 상당히 불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글은 그의 약점을 보완했다. 아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는 펜가문과 불화가 있을 때에도,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던 보스턴 차 사건 때에도 글로써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유의 자기 비하적이면서도 풍자적인 에세이에 그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영국과의 협상, 프랑스와의 미묘한 외교, 헌법이나 독립선언서 등의 주요 문서 작성에도 글 쓰는 능력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발명가로서도 글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과학적 이론이 부족했다- 이 부분에서도 다빈치와 닮았다 -. 대신 그는 발명한 물건이나 발견한 이론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글로 말이다. 대중들을 이해시키는 능력은 그 어느 학자보다도 뛰어났던 것이다. 일명 '프랭클린 난로'라고 알려진 주철난로를 개발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안내 책자를 직접 썼는데 그 내용이 무척 구제적이고 친절해서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과학자로서도 프랭클린은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던 셈이다.
그렇다면 프랭클린의 글은 어떻게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를 '미국 최고의 작가'- 1930년대 위대한 문학 비평가였던 칼 밴 도런의 표현이다 -로 만들었을까? 그의 글은 친근했다. 대중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자세하게 풀어쓰는 것을 즐겼으며 심오한 형이상학적인 주제보다는 실용적인 것에 매력을 느꼈다. 글의 형식과 내용 모두 거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미도 있었다. 특유의 위트와 뼈 있는 유머에 사람들은 공감했다. 사회의 불합리함- 혹은 불합리함을 만든 사람들 -을 풍자하고 조롱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거친 삶에 지친 대중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였다. 어찌 보면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프랭클린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프랭클린이 처음부터 글을 잘 쓴 것은 아니었다. 스무 살에 쓴 《자유와 강제, 쾌락과 고통에 대한 논문》은 거창한 주제에 비해 논리는 약하고 설득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노력했다. 그래서 결국 그만의 엑스칼리버를 갖게 되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프랭클린이 친구와 여성의 교육에 대해 논쟁을 별인 편지를 보고 아버지가 아들의 문체를 비난하였다. 프랭클린은 자기계발의 선구자답게 직접 글쓰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연습을 했다. 그는 에세이를 읽고 간단하게 메모한 후 며칠 동안 치워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에세이를 재구성하였다. 그 후 자기가 쓴 글과 원본을 비교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에서 부족한 점을 찾아내 개선했다. 그 밖에도 에세이를 시로 바꾼다던가 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항상 썼다는 점이다. 그렇게 프랭클린은 글 쓰는 근육을 키워나갔다.
책도 많이 읽었다. 그는 매일 한두 시간씩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하루는 여자친구- 평생 동안 프랭클린 곁에는 여자친구가 끊이질 않았다 -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추천해 주는 책을 읽는 거예요." 지식에 대한 욕구도 강했다. 그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다방면의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행 중에 돌고래를 연구했고 월식을 분석하여 지리적 위치를 계산했다. 그 외에도 멕시코 만류, 기상학, 지구의 인력, 냉장법 등 그의 관심사는 끝이 없었다. 이런 박학다식한 면모가 가벼워 보이는 그의 글에 무게감을 주었을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개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프랭클린의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프랭클린이라는 사람 자체가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위치에 비해 소박한 삶을 살았다. 가식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인지 대중들은 그를 편안하게 느꼈고 그와 공감할 수 있었다. 복합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는 친근하고 푸근해 보이는 인상 속에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외교활동-스파이에 가까웠다-을 할 때였다. 그는 매일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협상가의 면모를 보였다. 불리한 위치에서도 프랑스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모두 얻어냈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글에 녹아 있었다. 그의 글은 그의 삶과 닮아 있었다.
프랭클린의 삶을 들여다보며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박재범이다. 맞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아이돌 출신 박재범이다. 그는 음악적 역량이 뛰어났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곧잘 했다. 그는 그 무기를 활용해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얻은 부와 명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였다. 그는 현재 힙합계의 거장 중 한 명이다. 인기 있는 레이블을 몇 개나 가지고 있고 많은 아티스트들이 들어가고 싶은 회사의 주인이다. 뿐만 아니다. 주류 사업도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 이젠 사업가라고 불러야 하나 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까지도 회사가 어려울 때 대학축제에 가서 그의 히트곡 '몸매'를 불렀다고 한다. 행사비로 직원들 급여를 충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잘하는 것이 하나 있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일에 도전했을 때 특기가 성공 확률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역경의 시기를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전이 쌓여가면 어느덧 한 번의 성공이 찾아온다. 그리고 한 번의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을 부른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에는 스페셜리스트로 시작해서 다방면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앞서 말한 박재범이 그렇고 강연가에서 시작해 교육사업까지 손을 뻗은 김미경 씨, 음식점에서 출발해서 방송인, 기업인 등으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백종원 대표도 앞서 말한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특기를 수많은 성공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 이것은 어찌 보면 보통의 우리가 따라 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성공방정식일 것이다. 그리고 수백 년 전에 이를 몸소 보여준 사람이 프랭클린이다. 이것이 우리가 프랭클린의 삶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