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휴직을 하기로 했다

by 미즈킴 Mar 19. 2025

나는 또래에 비해 제법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기업에 들어가 부품처럼 사느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겠다는 열망과 객기에 사로잡혀 20대 중후반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데 허비한 탓이었다.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으나 돌이켜 보면 재능과 끈기 모두 부족했고 마음만 앞선 때가 태반이었다. 재주는 있었으나 깊이는 부족했다. 물론 운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무너져갈 때쯤 우연히 지금 다니는 회사에 합격했고, 만 스물아홉의 나이에, 내가 추구하던 길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제일 안정적인 직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글쓰고 먹고사는 것보다 훨씬 잘 됐다며 축하해 줬지만 나는 회사에서 좀처럼 행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입사하고 첫 몇 년 간은 주요 업무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던지라 그럭저럭 나 자신과 타협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일반적인 사무 업무나 민원 응대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일을 할수록 나는 그다지 일머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쓰기 능력은 홍보팀에서나 발휘할 수 있을 뿐 대부분의 팀에서는 엑셀이나 한글 워드와 같은 문서 작업 능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일을 못한다는 말은 듣기 싫으니 어떻게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미련을 떨었다. 정말 하기 싫은 일도 꾸역꾸역 하다 보면 지나갈 따름이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이따금씩 나를 사로잡았고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프리랜서로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이것저것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매달 들어오는 월급과 정년 보장과 같은 안정감은 매번 발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전보다 엑셀을 좀 더 잘하게 됐고, 전화 응대에 능숙해졌으며, 20대 때 그토록 원치 않았던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는 일에 익숙하게 됐다. 성격은 좀 더 더러워졌고 전보다 화도 많아졌다. 여전히 내가 하는 일 자체를 사랑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몸 담은 조직에 대한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끼게 됐다. 돌이켜 보면 여기서 일하는 동안 결혼이라는 큰일도 잘 치를 수 있었다.  


회사에서 도망치듯 휴직을 결정한 건 아니었다. 팀에서 하고 있는 일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어느덧 중간관리자 위치가 되어 일하기도 전보다 수월해졌다. 여러 시기와 기회가 맞닿아 1년가량 휴직하는 일이 가능해졌을 뿐, 사실 정말 도망치고 싶을 때는 쉴 수 있는 방도 자체가 없었다. 몸과 마음을 충전하면서 임신을 준비하는 게 휴직의 목표라면 목표다. 무엇보다 긴장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좀 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번 주면 벌써 휴직 3주 차에 접어든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오랜 휴가를 갔지만 잘 쉬고 있는 게 아닌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라도 회사에서 연락이 올 것만 같고, 평일 아침 늦게 일어나는 일이 어색했다. 한없이 게을러지는 게 두려워 의무적으로 등산을 간다거나 하루 중 반나절은 집안 청소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에서야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내 자신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굳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라고.


먼저 휴직을 다녀온 직장 동료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언니, 사람이 쉬면 순~~~ 해져요.


이게 며칠이나 갈지 모르겠지만 순둥이가 되는 그날까지 한번 열심히 쉬어 봐야겠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