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한테만 정직하시면 돼요, 속으로.

<나의 해방일지> 속에서 찾은 해방을 위한 규칙

by 윤슬

episode 12

대본집 3권 206p


#22. 커피숍 혹은 레스토랑(밤)

상민 : 환영합니다. 일단 저희 해방클럽 강령을 말씀드리자면,

향기 : 네 알아요. 조언하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상민 : 그건 부칙이고...

향기 : 아.

상민 : (태훈에게) 말씀드리지.

태훈 : 행복하자고 모인 모임이니까. 저희 인생을 좀... 정직하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세 가지 강령을 정했습니다.

향기 : (끄덕)

태훈 : 1.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향기 : (끄덕)

태훈 : 2.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향기 : (음?) 네...

태훈 : 3. 정직하게 보겠다.

향기 :...(쭈뼛쭈뼛, 생글생글) 근데요. 전 왜... 정직한 게... 무서울까요?

태훈 : 자신한테만 정직하시면 돼요. 속으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브런치 연재북 <나의 미정이에게>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상민, 태훈, 미정으로 시작한 사내 <해방클럽>의 해방일지였다.


작중 상민, 태훈, 미정은 모두 각자의 삶에 얽매여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속박에서 해방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삶은 고단한 거고, 오늘도 그 고단한 하루를 묵묵히 견뎌나가야지. 드라마 속 묘사되는 이들의 행동은 지극히 수동적이다. 회사 내 규정에도 그렇고, 본인들의 삶에서도 그렇고. 삶에 대한 불만 혹은 삶에서 짊어지고 있는 짐들이 가득해 이들의 낯빛은 어두웠고 의욕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해방클럽으로 만나는 횟수가 하나 둘 늘어날수록, 이들이 채워가는 해방일지가 한 두 장 늘어날수록 이들의 태도는 점점 능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내에서 무조건 동아리는 하나 들어야 한다는 내규 때문에, 회사에서 동아리를 하나도 들지 않은 유일한 세 명이 모였다.


이들의 변화가 인상 깊었던 건, 우리와 다를 거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이유였다. 늘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자각을 가지고, 스스로를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체념하며 조용하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미정. 직장과 일상에서 오는 반복과 피로 속에 무언가 자신을 다시 움직이게 할 계기를 원하지만, 초등학생 아이를 홀로 키우는 이혼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저 가정을 묵묵히 지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태훈. 태고난 말재주나 센스 없이 소심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 왔던, 그래서 사회적 관계 속에 늘 참고 무던히 살아왔던 상민.


각자의 상황은 다르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체념, 내가 속해있는 가정에 대한 체념, 사회생활에 대한 체념. 바라는 이상은 있지만, 그걸 실행하기에는 이미 주어진 삶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상태다. 그리고 이런 체념 상태를 이겨낼 대단한 스킬이나 의지, 체력이 없어 그저 묵묵히 버티고만 있는 인물.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인물상이 아닐까.


이런 평범한 인물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법한 그러나 이겨내기 쉽지 않은 상황을 이겨내며 변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비법은 무엇일까. 이 드라마가 많은 이의 공감을 샀던 이유는, '우리 삶 도처에 있는 평범한 인물들의 해방이 너무 극적이거나 비현실적이지도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했던 방법을 참고하면 나의 해방에도 도움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이 장면이 와닿았다. 평범한 인물들의 비범한 해방을 이끌었던 해방클럽의 수칙이 나오는 부분이어서. 1.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2.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3. (스스로에게) 정직해보겠다. 대단한 능력을 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행동할 마음을 먹지는 않는 일.


우리는 누구나에게 '잘 살고 있다'라고 증명해 보이길 원한다. 그리고 '내가 겪고 있는 힘든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고 공감받고 싶어 한다.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내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능력을 인정' 받아야 하고 내가 겪고 있는 문제는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황 자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라고 '나의 능력을 폄하당하지 않아야'하고.


그래서 그렇게 SNS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나의 삶에는 잘 굴러가고 있는 단면만 곱게 포장해서 내보인다. 행복한 척에 익숙해진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상황은 기를 써서 가꾸지만,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과 상황은 곪아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불행한 척에도 익숙하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누가 와도 어렵고 힘들만한 상황이야. 자기 연민의 다른 모습은 불행한 척이 아닐까. 이 힘든 상황조차 이해받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세상에서 제일(최소한 동네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곤 하지 않았나.


행복한 '척', 불행한 '척'. 실은 척이 필요가 없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 것이었고, 불행하다고 느끼면 불행한 것이었다. 판단 기준이 내면에 있다면 굳이 '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인생은 언제나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니 행복과 불행에 가치 판단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행동을 돌아봤을 때,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판단 기준 중 꽤나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러니 나의 삶이 그럴듯해 보여야 했고,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그럴듯해 보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서 '척'을 하는 순간들이 많아졌고,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척'을 하려면 스스로에게도 '척'을 해야 했다. 나의 생각이 가치관, 다짐이라는 필터를 거쳐 여과가 되는 거라면 생각의 전환이었다. 하지만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채 덮어놓기만 하면 그건 '척'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꾸역꾸역 맞다고 하는 것. 다른 말로는 정신 승리.


'척'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 번째 수칙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스스로에게 정직해보겠다.' 스스로에게 정직할 때라야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주함 앞에 설 때서야 비로소 내가 해방되어야 할 문제점과,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해결방법이 보였다.


스스로에게 정직하는 것은 타인에게 정직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타인에게는 '정직함'의 범위를 설정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정직한 거지, 이 정도면 사실과 다름없지.'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정직함'의 범위가 없다. 그 범위 설정조차도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무리 타협을 할래도 스스로는 이미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고 있다. 어렵지만 간단하다. 솔직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주기. 자랑스러운 나의 모습도, 부끄러운 나의 모습도, 뿌듯한 나의 모습도, 아쉬운 나의 모습도 모두 '나 자체로 인정해 주기'


스스로에게 정직하며 '척'을 하지 않고 삶을 바라보기. '나의 미정이에게' 연재 회차가 하나 둘, 쌓이면 나도 해방클럽 사람들처럼 조금씩 해방될 수 있을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