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열여덟 번째 해방
대본집 3권 143~144p
달빛만 있는 어두운 길을 구씨가 앞서가고, 미정이 따라간다.
가로등이며 인공 빛이 없는 데로 가는 느낌.
그렇게 걸어가는 모습에…
미정 : (E)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 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 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걸어온 어두운 길을 돌아보는 미정의 눈빛…
미정 : (E) 나… 뭐예요? / 나… 여기 왜 있어요?
그렇게 서서 보는 미정. 컷 튀면, 정상 쪽으로 가는 듯, 갈대나 숲을 헤치며 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미정 : (E)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 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중략)
미정 : (E) 난 합의 한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무엇이든 미루고 보는 지독한 습관이 있다. 일단 해야 할 일이 떨어지면 투두리스트에 적고 미루고 본다. 지금 당장 착수해도 될 것을. 플래너에 멀뚱히 적고 넘겨버린다. 미루는 습관으로 고생한 적이 숱하다. 그래서 이걸 고쳐보고자 미루는 습관의 원인은 뭔지, 해결방법은 뭔지 고민한 지 수년 째. 답은 알지만 쉬이 고쳐지진 않는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한 기준이 높은 완벽주의자이지만 타고난 성정이 부지런하지 못하다. 귀찮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부담감이 따른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기한이 닥쳐서야, 그제야 부랴부랴 할 일을 끝내곤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도 물론 알고 있다. 과업을 잘게 쪼개는 것. 부담감이 들지 않을 만큼 과업을 잘게 잘게 쪼개서 시작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는 것. 그리고 완벽함에 대한 압박을 내려놓는 것.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끝내놓고 검토하는 것.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과업을 잘게 쪼개는 것도 귀찮고 막상 일에 착수하면 실수하지 않으려고, 잘하려고 하는 욕심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올라온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이 잘 안 되는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대본집에서 위 장면을 읽으며 미뤄두고 있었지만, 미뤄두고 있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 현재를 미래로 미뤄두고 있는 것‘
현재 느낄 수 있는 여유, 평안, 행복, 설렘, 건강, 관계를 미래로 미뤄두곤 했다. 지금은 너무 바쁘니까. 이것만 끝나면 여유롭게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신경을 쓰고, 운동도 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안부 전화도 해야지. 지금 해야 할 일들에 잠식되어 내가 좋아하는 감정들을 느끼는 것조차 미뤄두었다. 이것만 끝나면, 나중에. 나중에 꼭.
오늘의 글을 쓰면서 되돌아봤다. 꽤나 오래전부터 ‘이것만 끝나면 ‘이라는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왜 아직도 ’ 이것만 끝나면 ‘이지. 연초에는 직장 일이 너무 바빠 이것만 끝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지만 이사 이슈가 터졌다. 이사만 끝내면 이제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또 직장에서의 일이 물밀듯 밀려온다. 이것만 끝나면 또 다른 것이 몰려왔다. 어차피 삶은 언제나 해야 할 것들이 물밀듯 밀려온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잊고 살았다. 그저 이것만 버티면 좋은 날이 찾아오겠거니. 미래만 바라보며 현재를 놓치고 살았다. 내가 사랑하는 현재의 것들을,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로 미뤄두고만 있었다.
미정의 대사가 크게 와닿았다.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그리고 내가 영원할 줄만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자꾸 미래로 미뤄두고 있던 걸까. 그 미래가 나에게 도착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건데.
현재를 살지 못해서 불안했다. 내가 발을 딛고 있어야 할 곳은 현재인데, 현재를 미뤄두니 발을 디딜 곳이 없어졌다. 현재를 미뤄두었던 미래는 실체가 없는 허공이었다. 허공에 발을 디뎌놓으려고 하니, 끝없이 불안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불안했다. 자꾸 현재를 미래로 미루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에도 게으른 완벽주의였다. 책 읽기든, 글쓰기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든, 운동이든, 안부전화이든. 5분, 10분 짧게라도 즐길 수 있던 것들인데. 완벽한 때를 기다렸다. 내가 사랑하는 감정들. 여유, 평안, 행복, 설렘 같은 감정들을 아주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 감정으로만 가득 찰 수 있는 때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 감정들을 만들어내는 독서, 글쓰기,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 운동 같은 것들도 온전히 그것만 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현재를 미뤄두었다.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이 대사에 한참 시선을 빼앗겼다. 그래, 나는 현재에서 천국을 볼 거야.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천국 말고.
현재를 더 이상 미뤄두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 다짐이 또 언제 사그라들지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꺼내 보며 마음을 다잡고 싶다. 현재에 발을 딛고 살아가자고. 현재에 천국을 만들자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더 이상 미뤄두지 말자고. 할 일도, 행복도 잘게 잘게 쪼개보자고. 하루에 오분, 십 분이라도 좋으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현재에 두자고. 그래서 현재를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만들고, 그 현재에 발을 단단히 디디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