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열일곱 번째 해방
대본집 3권 143p
보름달이 뜬 상황에서, 미정과 구씨가 가로등을 보며 서 있고.
구씨가 돌을 쥐고 홱 던지는데 한 방에 팍! 깨지는 소리.
가로등 불빛이 사라지자 희한한 공간으로 바뀐다. 전체적으로 회색빛.
뭔가 낯선 느낌에 둘러보는 구씨와 미정.
저 멀리 주홍빛 가로등이 보이긴 하지만 여기는 회색빛. 화성 어디쯤인 듯. 뭔가 서늘해지는 느낌.
그렇게 멍하니 풍경을 보고 있다가…
미정 :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애.
구씨 : !
미정 : 그래서… 밤이 더 제정신 같애.
나는 소위 말하는 대문자 I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에너지가 소모되기 시작되는 내향형 중 내향형이다. 스스로를 온전하게 충전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글쓰기, 책 읽기 정도. 마음이 복잡할 때면 집 밖으로 나가서 달리기를 하거나 걷거나, 집 청소를 하거나. 나의 에너지는 온전히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그 시간들에 익숙한 편이다. 세상의 시끄러운 잡음이 차단된 채, 고요를 맞이하는 그 시간들을 좋아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채워가는 시간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 시간들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잔뜩 지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퇴근했을 때. 똑같은 고요이지만 어느 날은 그게 평안하게 느껴지지만, 어느 날은 쓸쓸하게 느껴진다. 텅 빈 집 안에 들어있는 텅 빈 나를 채우는 건 오로지 쓸쓸함 뿐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허무주의로 빠지곤 했다. 다 부질없어 보였다. 스스로가, 그리고 삶이 텅 빈 껍데기처럼 여겨졌다. 그 쓸쓸함을 느끼는 빈도가 잦아진 요즘, 마침 쓸쓸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나의 해방일지 대사에 눈이 갔다.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다’는 미정의 대사. 이 대사를 보며 잠시 생각이 많아졌다. 두서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헤매다 하나의 결론이 났다. 아래는 그 결론을 적어놓은 메모다.
‘기분과 호르몬에 취해 있을 때보다 쓸쓸할 때 오로지 나를 직면할 수 있다. 가끔 외롭고 쓸쓸해질 때를 기꺼이 환대하자. 진정한 나와 마주할 시간이 찾아왔노라고.’
나는 언제 쓸쓸함을 느낄까. 그 감정의 조건을 하나하나 따져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혼자 있는 시간. 뒤를 이은 건, 에너지가 텅 비었을 때. 그 뒤를 이은 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너지가 고갈되면 뭘 하고 싶다는 의지조차 들지 않으니까). 그리고 설렘이나 기대 같은 긍정적인 생각이나 기분마저 텅 비어버렸을 때. 관계도, 행동도, 에너지도, 감정도 텅 비어있을 때 쓸쓸하다고 느끼곤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쓸쓸할 때 제일 제정신 같다는 미정의 말이 왜 와닿았는지 이해됐다. 그렇게 모든 게 텅 비어버렸을 때서야 비로소 이런저런 것들에 가려져 있던 진정한 내 생각이 들렸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에 집중할 테니 진짜 내 생각은 저 아래로 숨어들었다. 에너지가 있을 때면 무언가를 하게 된다. 집안일이든, 자기 계발이든, 무엇이든. 그러면 그 ‘행동’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 또 내 진정한 목소리는 저 아래로 숨어들게 되어있다. 긍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차있을 때는 내 안의 목소리를 진득하게 듣기 전에 방향을 틀어버리곤 한다. 가령, 특정한 문제에 고민하고 있을 때 긍정적인 감정이 차 있을 때는 ‘괜찮아 할 수 있어!‘, 아니면 ’그럼 이렇게 해볼까?‘와 같은 다짐과 계획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꿔버린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진득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채로.
쓸쓸할 때야 말로, 내 생각을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어쭙잖은 위로나 다짐은 접어둔 채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흘려보내지 않고 진득하게 마주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본인을 잘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라, 그렇게 진득하게 마주 봐주어야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그제야 아무런 갑옷도 껴입지 않은, 본연의 내가 나온다. 그제야 단단하게 두른 갑옷 밑에 숨어있던 내가 나온다. 그제야 나는 어떤 사람인지, 요새 나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보인다.
쓸쓸함이 느껴질 때면, 그 감정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문제가 있는 줄로만 여겼다.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걸까. 내가 내 삶을 제대로 채워가지 못해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그러나, 나의 해방일지 속 미정의 대사를 통해 깨달았다. 쓸쓸함은 부정적인 게 아니었다. 텅 비었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로, 나를 제대로 직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제대로 텅 비고 나야 제대로 직면할 수 있다. 제대로 직면해야 다시 잘 채울 수 있었다. 쓸쓸함이 슬그머니 찾아온다면, 기꺼이 두 팔 벌려 환대하자. 그리고 거기서 맞이하는 어떤 형태의 나조차도, 기꺼이 환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