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나 Nov 07. 2022

카르마 요가, <생활 속의 바가바드 기타>

책 

  책에서는 말한다. 세상 모든 것이 사실은 허상이고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실재가 아님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그렇다고 해서 삶에 대한 어떤 의욕이나 무엇을 성취하고 해내려는 마음, 또는 옳은 것을 구분하고 따르려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허상임을 깨닫고, 이 허상이 진상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내가 있는 지금 이 곳은 허상의 삶이며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내야한다는 것.

  

 실재로 다가서는 수행법 중 하나는 카르마 요가이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 내게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 결과에 현혹되거나 집착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 하지만 수험생들에게 결과에 대한 생각 없이 공부에 집중하라는 말이 어렵게 와 닿을 수 있다고 책은 말한다. 그럼에도 노력해야한다고.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하려면, 그 행동을 해야하는 판단 기준은 무엇으로 두어야 하는가? 현재의 의무에 충실해야한다고 하는데, 그 의무가 가지는 의미나 당위성이 모호하다면 사람은 왜 그 행위를 해내야하는가?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 모호하기 때문에 도대체 우리는 왜 각자의 행위들을 해야 하는 것인가?


  고등학생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공부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왜 저 문제집들을 쌓아두고 공부를 하고 있지? 무엇을 위해서? 주변에서는 좋은 성적과 대학교를 근거로 이야기하는데, 그 근거가 나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 좋은 대학교를 가야하는 이유는? 산다는 것이 정말 그렇게 단순히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맞는가? 누가 정한 규율이지? 결국엔 사람들이 스스로 정해놓은 체계가 아닌가? 어떠한 진리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문제풀이를 나는 왜 하고 있지? 이 좁고 답답한 책상 위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답게 흘러가는 세상의 풍경과 순간을 놓치면서. 나는 대체 무엇이지? 무엇이 되어야하지? 무엇을 추구해야하지? 어떤 것을 잘 하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지? 이러한 물음들이 내 안을 가득 채웠었다. 공부에 집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다행히 문학 작품을 읽고 해석할 때만큼은 즐겁고 해소됨을 느껴서 언어는 나한테 공부보다는 놀이였고, 영어는 원래 잘 했던 것 같아서 나름 반에서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살아갈 수는 있었다.


  어느 날엔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책상 위에 잔뜩 쌓여있는 수능 문제집들을 보면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의 강제와 강요에 의한 의미없는 행위의 반복에 숨이 막혔다. 삶에 아무 재미도 없었다. 오히려 죽음 이후에 무언가 굉장히 자유로운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탈출의 대상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아도 전혀 새로울 것도, 아쉬울 것도, 후회될 것도 없을 것 같은 무기력 상태. 책상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하고 멍하니 몇 시간을 보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나마 너무 괴로울 때면 시를 써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매일 매일 시를 써서 나를 잠시 다른 세계로 탈출시켰다. 내 안의 들끓는 것들을 해소시켰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게끔, 그래서 삶을 유지하게끔 해주었다.


  그렇다면 그 때의 나는 카르마요가에 의하면 결과에 대한 생각없이 공부에만 집중했어야 했을까? 그런데 왜 공부가 당시의 내 자신의 의무여야만 했을까?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의무'라고 결정짓게 만드는 판단 근거는 무엇인가? 의미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선행되어야하지 않는가? 만약 내가 그 당시에 공부를 완전히 놓았더라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었을까?


  아, 어떤 답이 떠오르는 것 같다. 만약 내가 그 순간에 수많은 의미와 선택지 중에서 '공부'를 나의 의무로 여겼다면 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그 안으로 뛰어드는 게 맞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 외의 것에서 의미를 찾았다면, 역시 그것에 뛰어들어 행하는 것이 맞다. 또는 계속해서 강요되어지는 행위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나만의 의미를 탐구했다면 그 자체로도 맞는 것이 아닐까?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삶의 궁극적인 의미, 어쩌면 허상 이면의 실재에 대한 진리 추구를 위해 사회적 행위를 그만두고 의미 탐구에만 몰두한다면 그것 또한 맞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하는가? 책을 더 읽어보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나갈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가을, 오후 다섯시 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