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는데에도 '마을'이 필요하듯이(영화 'Spotlight')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미국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Boston Globe’의 특종 팀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건의 조각을 찾아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2016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쥔 바 있으며, 영화를 보고 나서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일간지의 특종팀 멤버들이지만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언론’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는 내부적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종교 시스템(religious system)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과 유기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좁은 지역 사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이러한 구조적인 환경 속에서 어떻게 ‘악’이 발생하며, 그 ‘악’이 어떻게 보호되는지 특종팀의 눈을 빌려서 담담하게 알려준다. 주인공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감정에 소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과 긴박한 호흡을 함께 하는 동안 관객들은 마음이 뜨거워지고 만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구조적인 악이 주변에 얼마나 만연할지 자연스레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조악이 철저하게 보호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꽤나 선명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며, 그 구조악의 보호자들 중에 바로 자기 자신이 속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실화에 기반한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보스턴 글로브에 2002년 1월 6일 ‘Church allowed abuse by priest for years’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이 사건의 첫 취재는 새로운 국장인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 분)이 오게 되면서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보스턴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뜨내기'였다. 그는 게오건 신부의 추행 사건 한 조각으로부터 이것이 얼마나 만연되고, 널리 퍼져있는 일인지를 직감하고, 취재를 특종팀에게 권유하게 된다. 취재를 할수록 관련된 신부들의 숫자는 늘고 또 늘어간다.
이 취재의 실무자이자 기사를 직접 작성하는 마이크 레젠데스(마크 러팔로 분)는 이 사건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변호사를 끈질기게 찾아간다. 이 변호사는 이미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나왔기 때문에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극 중에서 이 변호사가 하는 말 속에 영화의 메시지가 거의 농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마이크(마크 러팔로 분)에게 묻는다. 왜 수십년간 묻혀 있던 사건이 이제야 취재되고 있겠냐고. 마이크는 대답하지 못하지만 변호사 개러비디언(스탠리 투치 분)은 알고 있다. 새로 부임한 국장이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며 보스턴의 유력한 사람들과 관련 없는 유대인이라는 점. 그의 ‘진실에 대한 자유로움’이 이 취재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안타깝지만 좁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의 감시는 내부적으로 일어나기 힘들다.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그만큼 관계에 취약하다. 좁은 사회는 내부적 결속력이 경쟁력인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취약점이 되기도 한다. ‘보스턴’이라는 도시마저 영화 속 아르메니안인 변호사 개러비디언은 ‘좁은 사회’로 보고 있다. 카톨릭 인구가 53%가 넘는 그 도시에서 이 만성적인 사건을 다룰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용기와 자유가 필요했다. 진실로 다가설 수 있는 그 자유와 용기를 지니려면 아무래도 외부적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개러비디언의 말 속에는 '사회악'을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산삼 같은 한 마디가 있었는데 이와 같은 이야기이다.
아이들을 키우는데에는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죠.
아이들을 학대하는데에도 마찬가지로 마을이 필요해요.
아동 성학대를 연구해온 학자는 오랜 연구 끝에 사제들의 6% 정도가 이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 가정대로 추산했을 때, 보스턴에만 90명의 성 범죄 신부가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특종팀은 피해자들을 수소문하고, 문서들을 찾은 끝에 훨씬 더 많은 가해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수십년동안 반복되는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이슈가 되지 못했을까?
그것은 아이들의 학대를 도운 ‘마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마을은 악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추기경을 필두로 하는 종교권력자들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성적으로 고려한 지역 인사들, 신부를 신의 대리인으로 순수하게 믿어버린 피해자의 부모들, 성직자를 고소하는 것은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아이의 피해가 혹시 세상에 알려질까봐 용기를 내지 못했던 가족들, 합의된 문서들을 민감성 정보로 분류하여 철저하게 비밀로 작업을 진행한 법원의 판사, 종교 권력을 변호하는 것을 직업적 사명으로 수행한 변호사 등. 각자의 동기는 선악이 없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구조악’을 이루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영화는 담담하게 제시한다.
심지어 그 마을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 중에는 특종팀의 시니어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 분)도 있다. 5년 전, 개러비디언 변호사가 이 사건의 핵심 정보를 메트로 부에 보냈지만 그 팀에 막 전입해왔던 월터는 정신 없이 그 편지를 지나쳤던 것이다. 무관심이나 바쁜 업무조차 '사회악'에게 주요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음을 영화는 소름끼치게 고백한다.
악의를 가지지 않고서도 사회의 구조적인 악의 연대에 함께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악'을 비호하는 마을은 빌런이 아니라 선의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차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구조악'은 그러한 마을의 선의, 무관심까지도 양분으로 공급받는다.
영화는 우리 사회를 메우고 있는 악이 그렇게나 구조적이므로 이를 다루는 언론 역시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한다. 동시에 이것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론이 사회 구조적 관점에서 사건을 다루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타이밍의 문제이다. 언론은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면 기사는 의미가 없다. 즉, 기사의 질과 무관하게 기사가 나가는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해질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 타이밍에 맞게 프레이밍을 하려니 구조적인 접근에 대한 욕구가 있어도 결국 사건의 한 조각 정도만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새로 온 국장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 분)은 극도로 이것을 경계한다. 같은 문제로 레젠데스(마크 러팔로 분)와 특종팀 시니어가 대립하기도 한다. 만약 이 사건 보도의 주어가 ‘Church’가 아니라 ‘게오건 신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교구 단위에서 ‘개인의 일탈’로 취급하고, 교구 대표자가 간단히 사과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언론이 구조적인 접근을 하지 못하게 되면 '구조악'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언론이 구조적 관점을 갖기 어려운 둘째 이유는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독자들은 거시적 관점의 기사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하루에도 수없이 노출되는 범죄 기사를 보라. 범죄자에 대한 서사, 범행 과정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설명하면서도 이러한 범죄가 왜 끊임없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구조적 접근을 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중들이 범죄를 저지른 한 사람에 대한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동안 '구조악'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웃으며 평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을텐데 말이다. 더 섬뜩한 것은 대중들은 자극적인 소설과 같은 그 기사를 읽는동안에도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 언론의 사명이 얼마나 무거운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보스턴 글로브 사의 특종팀이 이렇게 시스템적인 접근을 해 준 덕분에 취재는 장기화되었고, 그 사이에 전대미문의 테러(9.11.)가 터지는 바람에 이 사건을 터뜨리는 시기는 더욱 딜레이되고 만다. 결국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다음 해인 2002년 1월 6일이 되어서야 농익은 취재는 첫 기사를 내놓게 된다.(이게 실화라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이 뉴스 기사를 링크로 첨부한다.)
기사를 내보내고, 다음 월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한 특종팀 멤버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들은 일요일에 사무실을 찾게 되고, 모든 전화 라인이 다 울리고 있는 광경을 만나게 된다. 기사에 용기를 얻은 미국 전역의 피해자들로부터 제보가 잇따르게 된 것. 결국 이 기사 하나가 수십년간 관행으로 이어지던 종교계의 성적 학대를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종교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배타성에 항복하지 않으며, 대중의 구미에 맞게 타협하지도 않은 언론이 어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영화는 일요일에 불이 나고 있는 전화기들을 오버랩하며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다.
보스턴 글로브의 경험이 곧 우리의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악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개인의 차원에서의 반성은 분명 중요하고,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도 여전히 구조적인 악이 존재한다. 이러한 악은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이와 같은 것들을 도려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언론과 개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러한 소중한 인사이트들이 이 영화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다. 그 보석을 취하는 것은 오직 관객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