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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Aug 30. 2021

'갑'과 '을'의 인격의 무게는 같다

법무부 과잉 의전 논란을 통해 보는 조직 문화 유감

법무부의 과잉 의전 논란


이른바 ‘과잉 의전’ 논란이 뜨겁다. 지난 27일 아프가니스탄 특별입국자 지원 방안 등을 법무부 차관이 브리핑할 때, 한 법무부 직원이 무릎을 꿇은 채 차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로 우산을 ‘그런 자세’로 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 1차적 논란의 내용이다. 법무부 차관 혹은 조직적인 차원에서의 지시가 있었는지 또는 기자들이 원하는 ‘그림’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한 법무부 직원 분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인데, 관련 영상들을 보면 기자들이나 법무부나 매 한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우산을 든 직원의 '인격'보다 법무부 차관 브리핑의 '그림'이 더 중요했다.


기자들의 압박, 법무부 상관의 지시 등에 의해 점점 카메라로부터 몸을 숨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팩트체크나 잘못의 주체를 가리는 작업으로 끝낼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그 누구도 무릎을 꿇고 있는 그 직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언론사 기자들과 법무부 사람들에게 그 직원 분의 ‘무릎꿇기’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었던  같다.     

 

국민들의 시선이 머물지 못하는 수많은 길목에는 여전히 그렇게 무릎 꿇는 사람들이 있다. 작용과 반작용은 늘 함께 하듯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릎을 꿇리우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몇 사람이 바뀌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끊임 없이 공론화되어 개인의 인식조직의 생리, 사회적 구조의 차원에서 되짚어보아야 한다.



필자는 한국의 조직 문화에 있어서 ‘의전 문화’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몇 가지 아젠다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1. 직위의 고하(高下와) 인간의 존엄성(尊嚴性)을 구분하자.  

   

조직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오해 중 하나는 내가 가진 ‘직위’와 사람의 ‘가치’를 혼동하는 것이다. 수직적 구조의 관료 체계 내에서 ‘위계(hierachy)’는 그 체계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근간이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조직의 기능적(functional) 차원일 뿐, 각 사람의 인격이나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직위와 인격, 가치 등을 구분하기 어려워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높아지는가? 직위의 상승과 경제력의 상승이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되는가? 이 지점에서의 오해 때문에 이른바 ‘갑질(gapzil)’이 탄생하고 마는 것이다.      

조직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오해 중 하나는 내가 가진 ‘직위’와 사람의 ‘가치’를 혼동하는 것이다.


2. '의전'의 본질을 기억하자.   

  

‘의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의전’의 정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평화스럽게 하는 기준절차이다. 관계가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공부한 바를 올바르게 실행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본질은 ‘조직 내외의 평화와 소통을 위한 고민’이다. 그것이 의전이라면 우리 조직에 의전은 넘쳐나야 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근간이 되어야 개인이든 조직이든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부분의 공공기관과 관료 조직에서의 의전은 흔히 ‘승진을 위한 도구’‘본질을 잃은 관습’으로 전락한지 오래인 듯 하다. 수직적 구조에서 직위가 낮은 사람들이 조직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고, (사실상 관료조직에서의 업무는 능력 여하와 관련 없이 표준화되게 마련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하위 직급의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직무의 퀄리티가 높지 않다보니 조직에서 눈에 띄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충성심’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을 ‘의전 능력’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쉬운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의전’이라기보다는 ‘아부’에 가깝다.      


3. 암묵적인 동조가 가장 문제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그 ‘아부’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 이제는 관료조직에도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가 들어온다. 수평적인 소통에 능한 이들 세대에게 똑같이 손이 있고 발이 있는 사람끼리 물을 떠다주고,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은 어떻게 다가올까? 고개를 조아리고, 생존을 위해 자기 꿈과 자부심마저 꺾는 모습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없이 경쟁을 뚫고 그 자리를 향해 달려온 이들에게 조직에서 요구하는 ‘의전’은 평화를 도모하기보다는 표출할 수 없는 자괴감과 분노를 가져오기 쉽다.       




제 아무리 관료제 조직이라도 이제 서서히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 물음표를 붙여야한다. 대접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양하지 못하면, 결코 이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 잘못된 의전이 펼쳐질 때, 의전을 받는 당사자만큼이나 조직문화를 이끄는 다수의 리더들이 나서주어야 한다. 다음 세대들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기성세대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관료조직들도 이제는 이유를 모르는 충성심보다는 합리적이고 유연한 소통을 배울 시간이 되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아무리 좋은 직장에 다닌다한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나 개인 인격에 대한 예의를 해쳐가면서까지 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멀리 보면 장관이나 9급 공무원이나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는 아군이자 동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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