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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11. 2022

퇴사의 온도(溫度)

가족들과 함께 떠난 퇴사 여행

가족들과 함께 전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 홀로 자리를 잡았던 그 낯설었던 도시는 십여년의 세월이 흘러 아내와 두 아이와의 추억이 서린 도시로 변모해있었다. 2시간 남짓 걸리는 여정 속에 마음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천안 쯤부터 눈발이 흩날리더니 논산 정도에서 큰 눈으로 변했다.


십이년이라는 세월에 비해 사직서 한 장의 두께는 너무나도 얇았다. 일 년 선배인 인사과장님은 이 한 장의 서류에 근거하여 결재를 받아 사직 처리를 진행할 것이었다. 그리고 올해말 인사발령의 끝자락에 내 이름이 실리겠지.


가족들과 떠나는 이 길은 다름 아닌 퇴직 인사를 위한 여정이었다. 2년 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과 ‘퇴직’의 기로에서 우리 가족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보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생소한 선택지를 고르게 되었다. 새로운 도전이 함께이듯, 원래의 자리 역시 나 홀로 지켜냈던 것이 아니었다. 연고 없는 낯선 도시에 시집 와서 마치 자신이 일하는 직장처럼 섬겨주고 격려해준 아내가 있었기에, 또한 동동 걸음으로 아빠를 맞이해주던 아이들이 함께였기에 지켜냈던 자리였다. 그렇기에 나 홀로 그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보다는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이다.  


정문에 들어서니 캠퍼스는 이미 눈으로 인해 하얗게 변해있었다. 캠퍼스의 모든 길목길목은 큰 아이의 손을 잡고 누볐던 우리의 출근길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아이의 어린이집이 있는 본관까지 우리는 매일 손을 잡고 걸었었다. 봄에는 벛꽃이, 여름에는 초록초록한 나무들이, 가을에는 붉은 단풍들이, 겨울에는 오늘처럼 쌓인 눈이 우리를 맞이했었다.

봄에는 벛꽃이, 여름에는 초록초록한 나무들이, 가을에는 붉은 단풍들이, 겨울에는 오늘처럼 쌓인 눈이 우리를 맞이했었다.


이제 부쩍 커버린 큰 아이이지만 그 때의 기억만큼은 아빠를 독차지했던 기억으로 오롯이 남아있나보다. 그것이 내가 큰 아이에게 아직 사랑받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여동생에게 절반 이상을 빼앗겨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많이 보이는 아빠지만 녀석은 여전히 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녀석이 주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 매번 다짐하면서도 내 단점을 반복하는 녀석의 순간순간을 나는 너그러이 받아주고 있지 못하다. 그런 녀석의 손을 붙잡고, 본관의 계단 계단을 오른다. 지금보다 더 고사리 같던 녀석의 손이 이제는 많이 두툼해진 것을 느끼며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음을 직감한다. 더 늦기 전에 이 녀석의 손을 더 많이 잡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계단을 오르다보니 어느새 내가 일하던 4층의 사무실 앞에 와 있었다.



인사를 한다. 7살인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육아휴직이 2년이었으니 전주에서의 기억은 벌써 2년 전 기억이다. 하지만 아이는 빠짐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껴주던 실장님께 와락 안기는 것을 보고, 나도 갑자기 눈물을 쏟을 뻔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실장님께서는 사무실 앞에 달려있던 내 마지막 명패를 봉투에 담아 아이에게 건네주셨다. 거기에는 나의 마지막 직급과 담당하던 업무, 사무실의 전화 번호 같은 것들이 쓰여있었다.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는 그것을 소중히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아이가 성장하여 이것을 볼 때 어떤 감정이 들까 나는 문득 상상이 되었다.

거기에는 나의 마지막 직급과 담당하던 업무, 사무실의 전화 번호 같은 것들이 쓰여있었다.


한층을 내려와 총무처에 들른다. 이 부서는 직원들의 인사를 담당한다. 업무 협조를 위해 수시로 드나들던 이 사무실에 오늘 나는 사직서를 내고, 아이와 함께 인사를 하러 왔다. 그 사실이 다름 아닌 나에게, 너무 새롭다.


총무처장실에 안내되어 처장님과 실장님, 인사과장님과 나, 아들 이렇게 다섯명이서 둘러앉았다. 총무처장님은 유난히 큰 아이를 예뻐하셨었다. 매주 목요일마다 아침 기도회가 있었는데 그 날이면 나는 아이와 일찍 나와서 어린이집 등원 전에 그 곳을 들르곤 했었다. 아이도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그 시간을 무척 좋아했었다.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오는 모습을 너무 좋아하시던 총무처장님은 이제 부쩍 커버린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퇴직 후 나의 계획을 담담히 말씀을 드렸고, 그 새로운 도전과 함께 하게 되는 아이의 마음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작성해온 사직서를 꺼냈다. 아들에게 사직서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아빠가 이제 전주대학교를 그만 다닌다는 뜻이잖아요.”


명확한 설명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해석된 그 종이를 받기 싫다며 손사래 치는 인사과장님 앞으로 스윽 밀었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아이가 그 층에 있는 박물관을 보고 싶어해서 바쁜 인사과장님이 일일 큐레이터가 되어주었다.


아내는 아쉽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답례품을 나를 위해 준비해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가방에 담아 부서들을 돌 준비를 한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의 지난 십이년의 직장생활도, 앞으로 달려갈 도전의 길도 아무 의미가 없었을 터, 오늘도 그녀는 펄펄 내리는 눈 속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며 나의 인사길에 동행해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던 교수님은 아내가 함께 와 있다고 하자 같이 환대해주시고, 격려해주시기도 했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서들을 돌다보니 추운 날씨 속에 벌써 해가 져서 깜깜해져버렸다. 자리에 없는 분들도 많았고, 캠퍼스가 넓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정해진 시간 안에 다 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저녁식사는 동기들과 함께 했다. 추운 겨울날, 아늑한 조명의 고깃집에 들어서니 안경에 김이 서렸다. 아쉬운 마음을 하루 종일 담고 있어서 그런지 음식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동기들을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큰 복이었다. 나는 인생의 거대한 물결을 타느라 이제 퇴사와 함께 도전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지만, 동기들에게는 이 소식이 갑작스러웠을 것이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는 사람이 힘들다는 동기 형님의 말이 나는 공감이 되었다. 남는 사람이 더 힘들다. 더 힘든 사람들이 덜 힘든 사람을 격려하며 환송회를 해 주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리던 눈은 멈추었고, 뒷 좌석에서 아이들은 곤히 잠들었다. 나는 아내와 이 길을 달리고 있다. 고속도로든, 인생길이든. 때마침 우리는 결혼 10년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퇴직도, 새로운 도전도, 결혼 10년차도 모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세월을 보낸 후에 나는 뭔가 많이 성장해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는지, 늘 제자리인 것만 같은, 때로는 퇴보하고 있는 것 같은 나 자신의 모습에 조금은 울적해진다.


재정적 온실을 떠나온 나는 가족들을 이끌고 뱃머리에 선 느낌이었다. 이제 더 단단해질 필요도 있겠지. 그리고 세상을 향한 단단함만큼이나 가족들을 향한 온유함이 더욱 필요하겠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유대인 가정이 있었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가장은 아내와 자녀들에게 정신 무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족들을 향한 온유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쟁조차 아이에게는 놀이로 해석하는 아빠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우리 가족의 다음 스텝이 어떠한 모양일지 나로서도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나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왔던 그 가장의 모습을 마음 속에 심는다.

나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왔던 그 가장의 모습을 마음 속에 심는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아내도 아이들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도 잠시 머리를 뉘이고, 짧은 퇴사 여행을 마무리한다. 가족과 함께 하는 퇴사 여행이 참 멋졌다고 생각을 하며 나도 잠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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