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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엽 Nov 21. 2023

2. 지금 우리의 교실의 모습은 어떨까?

#교실의 모습

"교육의 애매성은 일반적으로 인간 경험의 애매성을 직접 반영한다."

 삶의 모습은 80억 인구가 모두 다르고, 같게 하려야 같을 수도 없다. 심지어 한 배에서 나온 형제, 자매, 쌍둥이의 삶의 모습도 차이가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을 다양성 또는 복합성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삶의 모습을 지극히 반영하고 있는 '교육'이라는 활동은 과학적으로 규명하거나, 공학적으로 검증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에서의 교육은 검증이 가능(실용적 측면)하고, 측정이 가능(평가적 측면) 해야 한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실제 이행되는 것 같다. '공정'이라는 핵심 가치를 내세우고 그에 따른 객관적 평가를 진행한다고 하지만 '삶'을 '객관'이라는 개념과 등치 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삶과 닮아 있는 교육'을 전제한다면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평가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심지어 그 '평가'를 최상위에 배치하고 그에 따라 교육의 내용과 교육의 방법을 구상하기도 한다. 

타일러식의 목표모형은 '교육내용의 수단화'나 '교육내용의 배제(실제 타일러나 블룸, 타바와 같은 목표모형의 주창자들은 수업 목표의 달성이 목적일 뿐 내용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하지 않았다.)' 등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반대급부로 교육의 특성상 구체적이지 않고 애매성을 가진 '난점(難點)'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점이 분명히 있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의 교실에서는 선호되는 교육의 모형이고 상당의 수업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교사의 교육관(敎育觀)은 대개 학생들에게 <예민하게> 전달된다."

 어떻게 보면 참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말이지만 어떻게 보면 참 무섭고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목표와 평가'를 지향하는 수업에서 교사와 학생을 예상해 보자. 교사는 어떻게든 목표에 도달시키기 위해,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업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사실은 '어찌 되든 서울만 가면 된다'식의 수업이다. 목표모형에서의 목표진술은 '행동목표'로 진술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본다. '안다, 이해한다, 감상한다'등의 의미적재(摘載)된 용어가 아닌 '쓴다, 열거한다, 비교한다'등의 잘못 해석될 여지가 없는, 그러니까 '바깥으로 드러나는' 용어로 진술되고 그것이 곧 평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결과는 다시 수업의 목표로 변환되고 다른 내용이나 다른 방식으로 수업은 이어지게 되는 '순환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목표모형'이며, 실제 학교에서의 수업은 이와 같은 형태를 상당히 지지하고 따르고 있다. 심지어 평가를 수업설계의 출발로 두는 백워드(Backword)식 수업에도 많은 교사들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수업 목표 다음 단계에 학생들이 학습한 결과의 증거로 인정할 수 있는 '평가'에 대한 내용을 먼저 설정하고 학습의 경험을 선정하는 '백워드 설계형 수업'은 내용과 방법이 주도하는 수업이 아니라 평가가 주도하는 설계 방식이다. (백워드 설계형 수업은 '행동목표'의 진술로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공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에 인정하면서도 실제 수업은 공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굳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교실에서의 수업이 이렇게 목표모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교육'의 성격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반대로 그런 목표나 평가보다는 다른 목적에 더 관심을 두는 교사라면 수업의 형태는 분명 달라지게 될 것이다. 좋게 말하면 웅장하고 거창한 '진선미, 지덕체'의 영역, 예를 들면 '사랑은 의무일까?', '비인간적인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술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울까?'와 같은 검증이 어렵거나 인문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 교과나 수업은 '행동목표'식의 진술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음악의 감상할 수 있다'라는 목표를 어떻게 행동목표로 진술한다는 말인가? '감상'과 같이 그 자체에 내용과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개념은 무수히 많으며 그것을 '목표모형'으로 실행한다는 것은 '모순'적인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수많은 '교과'를 다룬다. 교과는 우리의 삶의 양식을 축약하여 만들어 놓은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영역이다. 수학이나 체육, 문학과 같이 오래전부터 가르쳐왔던 교과도 있고 시대를 반영하여 새롭게 학교교육으로 들어온 교과도 있다. 목표모형에서는 '문제를 풀 줄 알면' 그 교과의 가치가 학생에게 실현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본다. 목표로의 도달만 가능하다면 '내용(경험)'에 대한 선정은 자유롭게 풀어두는 교육에 대한 공학적 시선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할 수 있고, '빙고게임'에 참여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교과의 가치를 획득했는가?라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필자의 궁극적인 문제의식인 '교육의 내용'에 대한 고민으로 다시금 연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교육의 내용을 교과라고 단순히 본다면, 우리 교육에서의 '교과'는 이미 공적으로 선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선택의 자유'는 교사가 가지고 있지 못하다. (교과의 큰 성취기준이나 핵심 아이디어에 따른 세부적인 교육내용은 교사에 의한 선정과 재구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교과를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대한 문제는 교사의 영역이다.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검증가능한 목표의 도달로만 평가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수업의 성패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AI를 필두로 한 '4차 산업혁명'의 여파로 디지털 자료나 소프트웨어(SW) 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교실에서도 노트북이나 크롬북을 활용하여 다양한 교육용 콘텐츠를 이용한 수업이 진행되고 있고, 코딩교육과 같은 SW교육 자체가 교육의 내용이 되어 진행되기도 한다. 수업은 더욱더 분명한 목표를 가지게 되고 계획과 예측이 명료한 '객관적인(?)' 교육활동이 이루어진다. '지식의 폭증'은 비단 현재의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은 쐐기문자로 수메르 점토판에도 나온다. 그것처럼 '지식의 양이 폭증하고 있다'는 말은 고대 희랍에서도 나왔던 말이다.) 분명 엄청난 지식이 '문명의 이기'의 발달과 더불어 유통되는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닌 지식을 활용하는 교육을 이야기하고, 더불어 디지털 기기와 웹을 활용한 교육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디지털 기기와 SW도구를 잘 활용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라고 한다면 앞에서 말한 '명확한'수업이라 하겠지만 여기서 지적해야 할 문제는 그 도구들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의 '내용'이다. 

과거 많은 교육사상가들이 주장했고, 실제 현재 교육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는 교육의 두 방향. 내용으로서의 교육(관념론)과 실용으로서의 교육(실재론)은 일반학교와 특성화 학교로 현실화시켰다. 예를 들면 독일의 김나지움(내용으로서의 교육)과 레알슐레와 하우프트슐레(실용으로서의 교육)를 들 수 있겠다. 특성화 중고등학교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의무교육 시스템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 철저하게 현실주의라는 '유교'의 전통이 저변에 깔려있는 우리나라는 교육에서도 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이 무엇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삶의 모습을 닮아 있는 교육', '교육은 삶 그 자체'라는 진리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와 신념이 반영되는 교육의 복잡성의 원인이다. 그 많은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학교는 교실은 교사는 '깎고 깎여서 ' 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 

마치 동물들을 모아놓고 나무 오르기 대회를 여는 것처럼 교육의 객관화(?)는 모순점을 부각할 수밖에 없음에도 그렇게 교육을 하는 것이 수많은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어찌 보면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을 식민지의 역사나 미군정의 개입과 같은 외세의 영향을 배제하고서라도 교육의 정책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 편이다. 아니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월견폐설(越犬吠雪) 촉견폐일(蜀犬吠日)이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법이 세밀해질수록 빠져나갈 구멍은 더 많아진다. 어찌 보면 단순함이 공정함을 더 보장해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공정함'을 가장 우선에 두었다' 교육과정 평가원(교육과정평가원이라는 국가기관이 존재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아마 우리나라 말고는 없을 것 같다.)의 해마다 반복되는 말은 그만큼 '입시'와 직결되는 우리 교육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입시'는 물론 공정해야 한다. '수능 확대', '입학사정관제의 부정', '내신에 대한 불신성' 등의 주장은 그에 대한 여론을 잘 보여주는 주장이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 우리 아이들을 바람직한 '성장'과 '행복한 교육'을 위해라는 기치도 함께 올리고 있다. '경쟁'이라는 시스템 아래서 '행복'이라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현실임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은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해야 한다.(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3가지의 난제(입시, 군대, 부동산)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교육 수요자의 요구는 속물적으로 날 것 그대로 표현하면 '입시'다. 다시 말하면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가 수요자의 요구고 교육의 목표이자 교육의 방법과 수단이 된다. 교육의 목적보다 목표가 더 성취해야 하고 지향해야 될 가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논의를 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필자의 관심이나 고민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교육의 대상이 되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교과 등에 대해서는 시스템만큼이나 고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서 이야기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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