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인가 방법인가?
"아무렴 자로 잰 치수 만하겠습니까?"
정나라 사람의 비유를 아는가?
신발을 사려고 하는 정나라 사람이 있었다. 그는 먼저 자기 발의 크기를 자로 재고 그것을 종이에 적었다. 시장에 도착했지만 발치수를 적은 종이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제가 발 치수를 적은 종이를 잊었네요"라고 말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발 치수를 적은 종이를 가지고 시장에 가니 이미 시장은 파해 신발을 사지 못했다. 한 사람이 물었다. "어찌 당신의 발로 직접 신어보지 않았는가? 정나라 사람은 말했다. "아무렴 자로 잰 치수 만하겠습니까?" <출처: 한비자>
지금 우리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사례를 잘 보여주는 고사라고 생각한다.
교사(敎師)는 말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이다. 여기서 '師'는 가르친다는 일에만 전용(全用)되는 말로 일반적인 '사(士)'와는 다른 개념이다. '가르친다'는 행위의 특수성을 용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교사는 지금 무엇을 가르치는가? 아마 흔히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를 가르친다'는 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사(필자도 교사다)는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있는가? 자꾸 '정나라 사람의 비유'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월견폐설(越犬吠雪) 촉견폐일(蜀犬吠日)'격으로 다른 이의 것이 좋다고 생각되면 교육이라는 도가니 속으로로 집어넣어야 하는 실태를 말하는 것이다.
최근 '2022 개정 교육과정'이 발표되었다. 1) 인공지능 기술 발전에 따른 디지털 전환, 감염병 대유행 및 기후, 생태환경 변화, 인구 구조 변화 등에 의해 사회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고 2)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이 확대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상호존중'과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3)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진로'에 맞는 학습을 지원해 주는 '맞춤형 교육'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4) '교육과정 의사결정'에 다양한 '교육주체'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교육과정 '자율화' 및 '분권화'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진다는 것이 개정의 주요 배경이다.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다양화되면서 이것을 전달해야(만)하는 교육의 발걸음은 분주하다 못해 이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초등학교에서 다루어야만 하는 범교과 주제를 살펴보면 1) 안전건강교육 2) 인성교육 3) 진로교육 4) 민주시민교육 5) 인권교육 6) 다문화교육 7) 통일교육 8) 독도교육 9) 경제 및 금융 교육 10) 환경 및 지속발전 가능교육 등 10 영역으로 분화되어 있다. (현실은 한자와 정보통신 윤리교육 등 더 세분화되어있다.)
지금 우리 학교 교육은 재료가 너무 많이 들어간 수프의 인용이 체감된다.
한 초등학교의 진도표다. 무슨 글자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등의 10개의 교과 이외 창의적 체험활동(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활동), 거기에 10개 영역의 범교과 주제. 그 외에도 필수현장체험학습(생존수영, 인성체험 등), 급식교육, 보건교육, 성교육 등 필수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그나마 2024년부터 적용되는 22 개정교육과정에서는 10개의 범교과 학습 주제가 10개로 유지한다고 한다. 물론 모두 필요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다변화하는 사회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야 한다면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의 교육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4차 산업혁명이기에 AI, SW, 코딩교육을 강화해야 하고, 디지털 시대에 발맞추어 전자교과서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올바른 경제생활을 위해 경제금융 교육을 강화해야 하고, 양성평등 사회의 실현을 위해 성교육의 확대와 자기표현 욕구의 충족을 위해 뮤지컬, 연극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이쯤 되면 가르쳐야 할 본질은 무엇인지 흐려지고 미션을 쳐내기 위한 방법만이 더 성행하게 된다. 정나라 사람의 비유로 표현하면 '발'이 아닌 '본'인 것이다.
'교육의 목적에 관한 혼란은 <교육>이라는 개념 속에 붙박여 있는 규범적 측면을 빼고, 교육을 다른 목적 성취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는 <진정한 학력, 2018>에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일본의 교육 변화의 일환인 '새로운 학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학력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즉, 유럽 열강과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었던 일본의 메이지 시대와 근대 경제 호황기를 이끈 '전통교육'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통주의 교육학자로 피터스(R.S.Peters)는 '교육' 그 자체가 가치로운 활동이며 어떤 외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교육이란 미성년자인 학생을 '문명화된 삶의 형식(=지식의 형식)으로 입문시키는 일'로 서술했던 피터스는 교육을 성인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인류가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쌓아 올리고 그것을 전수한 인류 문화유산으로서의 '교과'가 바로 '지식의 형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다시 물어볼 수 있다.
우리 교실은 지금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있는가?
초등학교 교사들의 교수 자료의 연구와 공유, 그리고 소통을 위한 '인디스쿨(indischool)'은 2000년에 개설된 이후 약 14만 명 이상(2023년 1.1 기준)의 선생님들이 활동하고 있다. 매년 2020년 이후 10만 건 이상의 수업 관련 자료가 탑재되고 있으며 누적된 첨부파일의 용량만 해도 10 TiB가 넘는다. 여러 선생님들의 연구와 노력이 담긴 수업 자료가 누적되고 있고, 이를 활용하는 선생님들도 증가하고 있지만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ppt와 사진, 영상 등의 미디어 자료가 대부분이고 그 자료의 선호도도 더 좋다는 것이다. 교사를 '가르는 전문가'라 말한다. 여기서 '사(師)'의 의미는 기술과 기능이 아닌 '가르치는 행위' 그 자체에 담겨 있는 전문성을 말한다. 피터스의 말을 다시 빌자면, 교육. 즉,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선험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인간의 고유 행위다. 하지만 위와 같이 너무도 많은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도가니가 된 지금의 교육, 특히 초등학교는 점점 더 가르쳐야 할 것들을 '쳐내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골몰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직종의 익명 커뮤니티처럼 초등교사의 소통의 장이기도 한 '인디스쿨'에서도 "이것으로 또 한 시간 때울 수 있겠군요.", "이거 틀어놓고 잠시 다른 업무 처리 가능하겠다"는 댓글들이 달리기도 한다. 20여 명 내외의(2021년 기준 초등학교는 21.7명, 중등학교는 24명 내외다.) 주당 평균 22시간의 수업(2018년 교육부 기준)과 10개 이상의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 범교과 활동에 생활지도까지 더한다면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칠 수 있다'는 가설은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사는 행정업무까지 겸하고 있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하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지적활동은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위의 문장은 브루너(Bruner)가 <교육의 과정, 1960>에서 '핵심적 확신'으로서의 주장이다. 즉,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친다는 것은 각 교과의 전문가들이 실제 수행하는 행위를 '수준(水準)'을 달리하여 지도한다는 뜻이다.
생물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초등학교에서도 수준을 달리하여 식물의 물관과 체관 등을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던지(미성년자의 해부 실습은 2019년부터 법으로 금지되었다.), 암석의 표본을 루페나 돋보기로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지리학자처럼 지도를 가지고 중심지를 찾고 중심지의 성립 요건을 알아본다던지, 역사학자처럼 연표를 가지고 사건의 인과관계를 분석해 본다. 수학자처럼 직접 어림을 하고 측정을 하고, 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토론하고 검증해 본다. 시인과 같이 리듬과 운율을 넣어 문장을 만들어 보고, 음독하고 낭독하며 퇴고(推敲)를 거친다. 예체능과 같은 영역도 마찬가지다.
각 교과는 일반화를 위한 '이론'으로 가는데 특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브루너의 '대담한 가설'이다.
이런 나선형 교육과정은 1) 계속성 2) 계열성 3) 통합성을 가진다. 이러한 브루너의 '교육의 과정'은 '학문중심교육과정'으로 이론화되어 미국의 60년대 교육과정의 근본 철학이 되었고, 이것은 우리나라 3차 교육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후 교육과정의 개정에도 여전히 '교과를 교과답게'라는 기본 전제에는 이 '학문중심'교육과정은 기본 철학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내릴 수밖에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다들 짐작하는 바와 마찬가지다. '입시'라는 지식의 양과 진도를 측정하는 현행 평가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평가'는 '과정'의 색깔을 바꿔놓을 수밖에 없다. 즉, 지식의 총량, 시험에 나오는 키워드와 핵심적 성취기준에 따른 문제, 이것을 단기적으로 독파하기 위해서는 기출문제의 유형을 분석하고 그 유형을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한다. 마치 공장의 숙련된 노동자들처럼 지금도 학원에서는 그렇게 학생들이 문제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상론적인 비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만은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칠 수 있는 여지가 '대입'이라는 거대한 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초등'에서는 가능하지 않겠나? 는 것이다. 교과를 교과답게 공부해 본 기억은 그 교과에 대한 개인의 감정, 즉 흥미와 동기를 만든다. 감정은 일어나는 것이다. 감정은 기억과 매칭된다. 감정은 지각된다. '수포자', '과포자'가 양산된다는 것은 그 교과에 대한 기억, 즉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위와 같은 여러 제도와 시스템 적인 이유로 교실에서 교과답게 수업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교과서에 의존하는 수업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가 필요 없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교과서는 가급적 필요하고 특히, 교사는 교과서에 대한 내용. 그 이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교과서를 그날 펴서 그날 읽어 나가며 가르치는 수업은 곤란하다는 뜻이다.)
우리 교육은 바이블과 같은 단 하나의 자료,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한다. 교과서에 담긴 '텍스트'는 진리요. 이를 머릿속으로 욱여넣는 것은 필수적 행위다. (암기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다른 편에서 고찰해 보겠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수명은 가련하리 만큼 짧다. '기억'은 불면 날아가 버리는 먼지와도 같아서 학습자의 의미 있는 경험과 매칭이 되지 않으면 잊히고 만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건만 억지로 교과서의 글자들을 억지로 집어넣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교과로서 가르치고 있는 지식이고(이것을 브루너는 '중간언어(middle language)'라고 명명했다.) 그것마저도 무수하게 가르쳐야 할 다른 것들과 혼용되어 제대로 전수와 전달(암기식 수업은 대부분 전수와 전달식 수업이다.)되고 있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한 '정나라 사람'처럼 '방법'이나 '수단'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진단해 본다. 특히 초등학생들은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미디어 자료에 익숙해져 있어 텍스트나 언어적 전달에 대해서는 더 신중하고 치밀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뜩이나 짧은 주의집중력에 더해 흥미를 금세 잃고 만다. 그러기에 더 화려한 기법과 방법에 치중하고, 내용의 재구성이나 학생의 발달 수준에 맞는 교과다운 자료보다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자료에 개발이나 공유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르쳐야 할 교과를 어떻게 가르쳐야 해?, 모든 교과를 구조와 탐구로만 가르칠 수 없는 것 아니야?' 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 한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방향이 없고 이론이 없는 실천은 공허할 뿐이다.
여기에 대한 고민은 이어질 장에서 이야기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