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와 잡탕수프
'지금의 우리 교육은 너무도 많은 재료가 들어간 잡탕수프다.'
<듀이와 인문학교육>(폴 페어필드, 2018)'에서 저자가 했던 말이다. 더 슬픈 사실은 메뉴의 서빙을 마치고 돌아오면 주방에서는 그 재료가 또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다.
메뉴가 휘황찬란하게 다양한 가게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감자탕집 설렁탕이 왠지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와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학교교육은 너무도 많은 것들을 단지 '사회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가져다 두고 학생들에게 집어넣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 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가르쳐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의 '교과'이외에 시사(時事)적인 이슈도 결국 '교육의 문제'로 치환되어 또 하나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으로 들어온다.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우리의 안위(安慰)를 위한 기초교육에 대해 물론 동감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요구사항'으로 바뀌어 '교육의 목적'이 되어버리게 되는 순간 이미 적재(積載)되어 있는 '목표'(이것은 분명 목적보다는 목표에 더 가깝다. 행동주의적 실행과 그에 따른 분명한 변화, 그리고 검증가능한 결과를 분명히 수많은 행정적 문서와 수치로 보고토록 한다.)의 상층에 또 쌓이게 될 '일거리'가 되어버리는 작금의 교육현장은 '이것이 과연 의미 있는 교육일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르침'이라는 행위는 아마 우리의 선조들이 문자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6천 년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동물사회에서 볼 수 있는 생존을 위한 전수 활동이 아닌 '문명화된 삶의 양식'으로서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라스코 동굴' 벽화나 '울진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다. 문자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우리 인간은 '집단의 기억'을 훨씬 빠르고, 폭넓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수단이 되고 점차 저변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교육'은 '생존'과 '훈련'으로서의 기능보다, '사회가 의도한' 구성원으로서의 '성장'을 위한 양태로 그 '목적'을 달리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의 의도'라는 부분이다. 교육의 개념을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현대 교육학의 선구자인 정범모 선생님께서 정의한 '인간 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는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분명히 짚어주고 있다. '교육'에는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고, 그에 따라 교육과정이 편성되어 학생들을 지도해 나간다. 특히 대부분의 공교육으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학교'라는 기관은 그 '계획적인'이 사회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정범모 선생께서는 분명 그 '계획'이라는 것을 분명 '교육'의 외재적에서만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과연 그 '목적' 조차도 우리에게 있었나? 지금 우리는 '왜 가르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지금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필자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다. 가르친다는 행위에 '숭고함'이라는 의미를 이제 조금 느끼고 있는 20년 경력의 교사이지만 부끄럽게도 '왜 가르치는지?'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을 그간 진지하게 해 본 적은 없다.
국가에서 정해놓은 '성취기준'과 그에 따라 출간된 국정, 검정 교과서를 가르쳐왔고, 교육과정의 편성은 학교의 연구부장을 중심으로 학년의 연구 담당 선생님께서 교육부에서 제시한 기준 시수에 맞추어 작성한다. 사실상 학년의 교육과정도 학교의 교육과정도 실제 가르치는 행위를 하는 '교사'의 개입이 없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1년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 교육과정에 '시사(時事)'성이 있는 내용들이 추가로 들어오게 된다. 학교폭력, 정보통신윤리, 교통안전, 환경, 경제금융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야의 입김이 교육과정에 추가되는 것이다.
교사가 주도적으로 편성에 참여하지 않고 만들어진 '교육과정'은 자연히 '주도성'과 '창의성'이 상실되고 거기에 끌려가게 된다. 가르쳐야 할 총량이 정해져 있고(교과서를 가르치기에) 거기에 따라 '진도를 나간다'는 표현은 학교 현장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관용표현이 되었다. '시험'이라는 형태의 '평가'가 중간중간 학생들의 학습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진도'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진도를 빼지 못하면 교사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 어떻게 하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변명을 해보자면 '왜 가르칠까?'라는 질문이 생성될 수 없는 '현실'을 탓할 수도 있겠다. 또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분명 당신은 '시험'을 치르기 위해 '진도'를 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것이 가르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과연 시험을 잘 치르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 시험에 나오지 않는 과목들은 왜 가르쳤고, 시험에서 기준점수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가르침'은 '실패'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시험'을 치르기 위한 '교육'은 '목적'이기보다는 '목표'에 더 가깝다고 규정할 수 있겠다. 교육과정의 '모형'에서도 '목표모형'이 주창하는 바도 이와 같다. 목표모형의 주창자인 'Tyler'는 교육과정에 담기는 학습경험의 선정과 조직은 평가에까지 이르고, 다시 평가의 결과가 다음 교육목표로 이어지는 '순환과정'을 강조했다.
즉, 나는(우리는) 목적이 아닌 목표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들을 가르쳐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학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그것은 해결되기보다는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모두가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에 '왜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고민과 성찰 없이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위태롭고 가치가 없는 일(학생과 나에게 모두)이 될 수 있기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생각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