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립 Jan 31. 2020

<나이브스 아웃>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자리를 내주는 것

<나이브스 아웃>: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자리를 내주는 것


영화 <나이브스 아웃> 포스터


세계는 인정투쟁 중이다. ‘나’의 존재와 소유를 인정받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고군분투 중이다. ‘아메리카 퍼스트’는 ‘정통’ 미국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부와 번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이다. ‘미국인’의 존재와 ‘미국이 가진 부’의 독점을 인정받겠다는 이들을 대변하기 위해 나왔다. 한국도 최근 정당을 옮기며 주목을 받은 이주민 정치인에게 “한국에서 일자리 뺏는 너희 나라 사람 대변할 거면서 왜 여기서 정치를 하냐”는 힐난이 쏟아졌다. 일자리 부족 등으로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지자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배척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겠다는 몸부림의 결과다.     


이처럼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리할 곳을 주지 않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은 밥상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같이 밥 먹을 자리를 줄 만큼 동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상에서 식사를 하거나, 남성들이 다 먹은 이후 남은 것을 먹어야 했다. 흑인 전용 화장실, 학교, 별도의 버스가 존재했던 이유 또한 흑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리할 곳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장소의 점유’를 이용해 저택에서 벌어지는 인정투쟁 과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인정투쟁의 모습을 사회 전체로 확대한다. 추리소설의 대가인 할란은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전체 집을 좌지우지한다. 그가 위치한 곳은 그가 저택을 비롯해 가족 전체에게 끼치는 큰 영향력을 보여준다. 반면 마르타는 온 가족이 ‘너는 우리 가족이야’라고 하지만 저택에서 자리할 곳이 없다. 할란의 생일, 온 가족이 편히 앉아 파티를 즐길 때도 저택 어딘가에 잠시라도 앉아있지 못한다. 가족들이 정치적 이야기를 할 때도 대화의 대상이 되어 안절부절 하며 서 있을 뿐이다. 할란의 가족과 처음으로 같이 앉아 대화하는 순간은 할란의 유산을 마르타가 모두 상속받는 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다. 그마저도 마르타를 이용하기 위해 랜섬이 손을 내미는 순간이며, 온전히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받지도 않는다.     


<나이브스 아웃> 속 할란의 가족들


마르타가 위치할 장소가 주어지지 않은 기저에는 가족들이 벌인 인정투쟁이 깔려있다. 할란의 아들 월트는 아버지의 작품을 영화화하고, 각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두터운 신뢰를 받길 원한다. 며느리 조니도 금전적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인정받길 원한다. 이들이 ‘마르타는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던 이유는 마르타가 이들의 인정투쟁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방해할 만큼 큰 존재가 아니었기에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할란의 유언이 알려진 이후, 마르타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던 가족들의 생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큰딸 린다는 “우리 아버지와 속궁합이 맞았느냐”는 말을 통해 마르타가 좋은 이유는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이민자의 위치’일 때라는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들은 마르타로부터 유산을 빼앗아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유산을 받은 것은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프란을 살리려고 구급차를 부르고, 할란의 가족들이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만들 수 있도록 할란에게 조언하며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주려 노력했던 마르타였다. 저택 안의 마르타와 저택 밖의 가족들이 대비되는 마지막 장면은 장소를 통한 인정투쟁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My house, My rules, My coffee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장소를 통한 인정투쟁의 모습은 여러 영화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어스(US)>의 경우 스릴러의 형식을 통해 <나이브스 아웃>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지하에 살던 ‘묶인 자들’이 ‘지상’이라는 장소를 차지하고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을 시작한다. 묶인 자들에게 장소의 점유는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장소의 점유를 통해 마르타 존재의 인정을 표현했던 것과 비슷한 비유다.      


이 외에도 영화는 도넛 모양으로 칼들을 모아둔 장식품,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라고 써 있는 할란의 컵과 같은 소품을 통해서도 영화의 메시지를 극대화한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 오래된 느낌을 주는 화면 분위기 또한 추리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에 기여한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범인의 편에서 영화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색다른 매력이다. 하지만 이를 그려내는 과정이 긴 만큼 허리가 조금 아플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답이 없는 시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