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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립 Feb 09. 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눈빛으로 말해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눈빛으로 말해요     


연기와 흉내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눈빛의 유무다. 슬픈 연기를 할 때 배우의 눈빛은 ‘슬픔’ 하나만을 담지 않는다. 그리움에서 나온 슬픔일 수도 있고, 분노, 무기력, 행복 등이 섞인 다양한 슬픔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배우에게 ‘눈물연기’를 요청하는 것은 꽤나 무례한 일이다. 슬픈 연기를 ‘눈물’에 국한해 슬퍼 보이는 ‘흉내’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 눈빛의 오고감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에 대해 보내는 눈빛을 보고 있으면 애절함과 그리움, 기쁨과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다. 영화 속 눈빛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서 보려고 한다. (스포일러를 대놓고 포함하고 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

# 줄거리 소개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다.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고 그의 집에 방문한다. 결혼을 원하지 않는 엘로이즈는 초상화 속 대상이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일주일 가량 자리를 비운 사이 엘로이즈와 친해지고, 함께 여러 경험을 하며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시대 상황 상,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귀족 집안인 엘로이즈의 경우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더 힘들었다. 이런 상황을 알기에 두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서로의 사랑을 남겨두기로 한다.

     

# 첫 번째 눈빛 :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엘로이즈의 어머니(백작부인)가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완성한 후 떠난다. 집 문 앞을 막 나서려는 찰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돌아 봐”라고 말한다. 이 때 두 사람이 나누는 눈빛은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라는 말을 담고 있다.     


흰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엘로이즈의 모습. 엘로이즈의 집에 있던 내내 마리안느에게 보였던 환영이기도 했다. 그 문을 그대로 나섰다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사랑했던 것 자체를 후회했을 수도 있다. 비록 그 전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둘 다 서로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고 기억하기로 다짐했음에도 말이다. “돌아봐”라는 말과 마지막에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나누는 눈빛은 오로지 ‘여성의 결혼이 당연시되는 사회 분위기’ 탓이 아니라 ‘서로의 미래’를 위해 이별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치마에 불이 붙은 엘로이즈

영화 초반 언급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와도 연결된다. 지금까지 일반화 된 해석은 동굴을 나서는 순간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이 신화에 대해 “에우리디케가 ‘돌아봐’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무기력하게 누군가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지하에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려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혹은 지상으로 빠져 나가더라도 자신을 지하에 가둔 하데스에 의해 둘 다 고통을 받을 수도 있는 운명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고통을 끝내는 것을 택했을 수도 있다.     


지상으로 나오려고 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도 백작부인이 없는 틈을 타 도망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이후 두 사람의 삶이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엘로이즈가 결혼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결혼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마리안느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닷가에 있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사회 상황으로 인해 둘은 서로를 오래 보는 것 (그것이 결혼이 될 수도 있고 도망쳐서 함께 사는 것이 될 수도 있다)을 선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결정이 완전히 타의적인 것은 아니다. 에우리디케는 “돌아봐”를 외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이별하려 한다. 엘로이즈도 마찬가지다. 도망치듯 가는 마리안느에게 “돌아봐”라고 외치면서, 떠밀리는 이별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보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스스로가 결정한 이별임을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결정이었으며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된 것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사랑의 모습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소유’로 접근한다. ‘너의 시간, 네 생각의 일부는 나의 것’이 사랑이라고 여겨진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지금 당장 보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놓아주는 방식으로 오래 남는 사랑을 한다. 좀 더 나아간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 두 번째 눈빛 : 연대의 시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외에 주목할 또 하나의 사람은 소피다. 엘로이즈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다.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연대하는 눈빛을 공유한다. 소피가 임신중절을 하려고 민간요법을 할 때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모두가 함께 도와준다. 임신중절을 전문으로 하는 이에게 찾아갈 때도 함께한다. 수술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소피를 보지 못하는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직접 보고 기억하라’며 똑바로 보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그림으로 남긴다.     


엘로이즈, 마리안느와 소피


임신중절은 여성만이 겪는 일로 치부됐다. 임신중절을 겪는 ‘여성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그 과정에서 남성의 행동은 사라졌다. 죄책감(사실 이것도 만들어진 감정이라는 말이 많다), 신체의 고통 등 어려움은 여성에게만 강요됐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이를 그림으로 남기게 하면서 임신중절을 여성에게 국한된, 감춰야 하는 기록이 아니라 삶의 일부를 차지하는 중요한, 당당한 역사의 하나로 만든다. 소피, 마리안느, 엘로이즈가 연대하며 서로의 힘이 돼 주었기에 가능했다. 여성도 역사의 일부이며 주체적일 수 있다는 것, ‘죄악’으로 여겨졌던 임신중절도 다르지 않다는 시선을 보여줬다.     


임신중절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간 모임에서도 여성들이 손에 손 잡고 원을 만들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소피와 마리안느, 엘로이즈가 함께 식사를 준비하는 것 또한 연대의 눈빛을 잘 보여준다. 소피는 ‘하녀’임에도 십자수를 놓고 있고, 귀족인 엘로이즈가 칼질을 하며 식사를 준비한다. 마리안느는 그 사이에서 양측 모두와 이야기를 하며 일을 돕는다. 계급․직업에 상관없이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전혀 이상할 게 아니라는 점에서 기분 좋은 장면이었다.               



# 세 번째 눈빛 : 가려져 온 여성의 시각     


집중하는 눈빛의 마리안느

     

사랑을 다루는 영화에서 여성의 눈빛은 이별에 고통 받거나, 사랑에 빠져 사리분별을 못하는 것에 국한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랑에 빠진 여성의 다른 눈빛을 그려낸다. 마리안느가 비발디의 사계가 연주되는 공연장에서 엘로이즈를 마지막으로 본 때, 2분 37초간 엘로이즈의 눈빛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그 눈빛엔 만남, 이별, 회상, 분노, 체념 등 다양한 감정이 한번에 담긴다. 여성에게도 하나의 감정이 아닌 여러 가지의 감정이 있고, 생생히 생각하고, 기억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눈을 감고 감정을 삼키키도, 숨을 크게 몰아쉬기도, 눈물을 흘리다 웃기도 활짝 웃기도 하는 등 한 사람만을 꽤 긴 시간 잡고 있음에도 관객이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버지의 그림이 아닌, 자신의 그림임을 설명하는 마리안느

엘로이즈의 다양한 눈빛은 아버지 이름을 빌려 그림을 출품할 수밖에 없는 마리안느의 상황과 대비된다. 마리안느가 ‘반응을 보고, 설명하기 위해’ 그림 앞에 있다고 했음에도 그 작품이 여성인 그의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다. 여성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표현할 수 있음에도 가려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 셀린 시아마는 엘로이즈 역의 아델 하에넬과 실제 연인 사이였다. 지금은 헤어졌음에도 둘은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 작품을 완성할 정도로 사이가 좋다. 감독은 이 영화를 둘의 관계에 바친다고 말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보여줬던 좀 더 성장한 사랑의 모습을 셀린 시아마와 아델 하에넬이 보여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계와 시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영화를 누군가에게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관계가 한국에서도 더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모두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공식 포스터와 사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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