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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23. 2023

사는 게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지더라도

<샬롯의 거미줄>, 엘윈 브룩스 화이트

윌버는 새끼양 한 마리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저, 나랑 놀지 않을래?"

새끼양이 말했다.

"싫어! 우선, 난 네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내가 너무 어려서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돼지한테는 관심 없어. 나한테 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만도 못해."

윌버가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도 못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만도 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그건 가장 밑바닥을 말하는 거지. 한계선의 끝이라고. 어떻게 무언가가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할 수가 있지? 만일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그건 무언가 있다는 거야. 아주 조금일지라도 말이야.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잖니." 

_ <샬롯의 거미줄>, 엘윈 브룩스 화이트



어머, 이 돼지 라임 보소.

권장 연령 초등학교 5학년 이상 시공주니어 문고 독서레벨3 중 한 권인 <샬롯의 거미줄>을 읽다가 38세인 나는 윌버의 패기 있는 대답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아니 이게 무슨 내가그린기린그림은잘그린기린그림같은 소리야!"라고 반격해도 소용없다. 난 이미 K.O 패를 당하고 말았으니까. 

그렇지. 존재한다면, 여기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은 될 수 없지. 새끼양은 윌버를 귀찮은 듯 내쫓았지만 나는 윌버의 우리 구석에 서서 비트를 타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홉 살인 나의 딸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것만 못한 것'은 없다. 자신감이 넘친다. 아무리 엄마라지만 객관적으로 노래를 잘한다고는 볼 수는 없는 편인데, 꽂히는 노래가 있으면 가사를 외우고 반복해서 부르고 녹음하고 난리가 난다. 음정은 자이로드롭처럼 갑작스레 떨어지고 박자는 줄타기 곡예처럼 위태위태하게 하다. 프리스타일이다. 완창을 하면 내게 꼭 묻는다. "엄마, 나 잘하지?"

자기가 만들어온 미술 작품을 자랑하느라 하굣길은 언제나 진도가 더디고, 집에서도 뭘 만들든 꼭 내게 와 보여준다. 멋지지. 잘했지. 생각 좋지.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너무 많아서 대답하기 힘들다고 한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기도 하겠지만 자기가 멋지게 해낼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막 자기 힘으로 뭔가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대개의 부모는 열렬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두 다리로 번쩍 서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보내고, 아장아장 걷기라도 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계단 하나만 내 힘으로 올라도 우쭐해지는 유아기를 지나 가슴을 펴고 소리쳐보자 우리들은 새싹들이다의 시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갈수록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세상은 넓고 내가 잘하는 것들은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며, 별의별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 번쩍 저기 번쩍한다는 것이다. 조금씩 아무것도 아닌, 하지 않느니만 못한 영역이 늘어간다.


나는 일기를 쓰며 정말 많은 다짐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용기를 내자거나 무의미한 것은 없다거나 적극적으로 살자 따위의 것들이다. 다짐하지 않으면 잘 안되는 일이기에 쓰고 또 쓴다.

생각이 긍정 회로로 가려면 클라이밍 하듯 영차영차 올라야 하는데, 부정회로로는 미끄럼틀 탄 듯 슝- 하고 잘도 간다. 다 그렇지 뭐, 하고 염세하고 나면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진다. 오늘 하루에, 주어진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부지런히 세수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무언가를 소망하고 일을 하고 잠들지만 그런데도 사는 게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또 생각한다. 동굴 속에 벽화를 그렸던 원시시대 사람처럼 뭐라도 해보는 거라고, 여기 내가 있었다고 끄적여보는 거라고.


심리 상담에서 기본이 되는 태도가 '인정'이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 여기 있는 나를 없다고, 내가 한 무언가를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는가. 어떻게 뭐라도 한 것이 안 한 것보다 못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그건 무언가 있다는 거야. 아주 조금일지라도 말이야."

어깨만 스쳐도 풀싹 쓰러지는 멘탈 허약자인 나는 앞으로 아기 돼지 윌버의 화려한 라임을 종종 되새겨볼 것 같다.  비록 주방은 초토화되었고 밍밍하고 임팩트 없는 반찬을 만들었다고 해도, 주상 전하 같은 딸아이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먹는다 해도 나는 조금의 영양 성분과 포만감을 딸에게 주었다. 비록 바이트 낭비 같은 시금털털한 글을 썼을지언정 오늘 내가 살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주 조금의 의미라도 남겼다. 아주 아무것은 아닌 내가 여기 있고, 아주 조금일지라도 무언가를 하며 살았다.

자조의 영역에 격일로 퐁당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열심히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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