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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y 31. 2022

세상이 말끔히 지워버린 곤경들에 대하여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박서련 소설집

책을 덮고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박서련은 천재야.

소설가의 일을 잘 모르는 나지만 그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창조하고 각각의 마음의 방, 그 방의 방, 그 방의 방의 방까지 속속들이 바라본다. 그리고 그 장황한 이야기들을 효과적으로 함축해 머리가 뎅 울리는 강력한 한 방을 날린다. 각 단편을 읽을 때마다 순식간에 인물에 몰입되었고 아! 하는 탄식으로 이야기를 빠져나왔다. 


아들의 무탈한 교우 관계를 위해 게임 과외까지 받는 엄마, 뇌졸중과 치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엄마를 돌보는 딸, 10년 근속 포상 여행 상품권을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와 쓰게 된 며느리, 자신이 창작한 소설, 그러니까 지어낸 허구를 가지고도 본인의 됨됨이를 평가받는 여성 창작자, 대중에게 티 없이 순결한 어린아이 같기를 강요받는 아이돌... 


사회에서 여성에게 덮어 씌우는 이미지와 당연하게 요구되는 것들에 대해 작가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정말 이게 맞아? 이렇게 계속 '개인의 일'로 선 그어두면 되는 거야? 멍이 들던지 곪아 터지던지? 그 날카로운 시선에 소름이 오소소 돋다가도 개인의 이야기이며 모두의 이야기인 글들을 읽으며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생각했다. 사회가 말끔히 지워버린 그들의 곤경에 대하여, 내게도 언제 드리울지 모를 그 그늘에 대하여. 





엄마가 예전의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엄마를 가둬 놓은 것에는 죄책감을 느낀다. 엄마를 잃어버리면 엄마를 제대로 모시지 않은 것이 되는데,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둬두면 학대가 된다. 엄마가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억지로 뭔가를 먹이는 것도 학대고 아무것도 먹이지 못해 엄마를 굶기는 것 또한 학대. 엄마와 관련된 일마다 빠짐없는 모순이 있다. 엄마를 사람으로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이 엄마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일이 되는 모순. 보다 근본적인 모순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불쑥불쑥 원희의 속을 뚫고 나온다. 엄마가 아직도 사람일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대체 사람일까 하는.  _ <기미> 중


이것은 '내 얘기'이고, 내 소설이며,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_ <그 소설> 중


애초에 스무 살 무렵 첫 섹스를 해 본 건 남자애들도 나도 다른 여자애들도 매한가지인데 같은 경험을 남자애들은 모험담처럼 쓰고 여자애들은 임신과 낙태야 대한 공포 소설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드디어 섹스해 봤다 너무 신난다 광고하는 듯한 소설을 써 온 남자애들은 절대 낙태 소설을 써 온 여자애들만큼 망신을 당하지도 않았다. _ <그 소설> 중


가족 내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돌봄 노동의 괴로움이란, 육체적 피로와 돌봄 대상과의 정서적 관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괴로움에는 친밀한 사람들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소외감까지 더해져 있다. _ 작품 해설(이지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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