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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ul 29. 2022

시선

딸이 난생처음으로 깁스를 한 다음 날, 우리 집은 아침부터 눈물바다였다. 아이는 일어나서 울고, 등굣길에 울고, 교문 앞에서 또 울었다. 교실에 깁스하고 입장하는 것이 몹시 부끄럽다면서.

시선이 자기 팔로 모이는 것, 왜 다쳤는지 계속 설명해야 하는 것이 너무 싫다고 했다.

“엄마가 사십 년 가까이 살다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고.” 나는 되지도 않는 조언을 던졌고, 그 말은 온 우주가 본인 위주로 돌아가는 아동기의 힘센 자아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이런 면모는 꼭 나를 닮았다.

나에게도 선뜻 교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던 날들이 있었다.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거나 새 옷을 입은 날이면 누군가 반응을 보일까 봐, 놀리거나 칭찬할까 봐, 그래서 시선이 모일까 봐 두려웠다. 엄마가 사준 빨간 체크무늬 코트는 예쁘고 강렬해서, 탈부착 가능한 카라 장식이라도 떼야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하얗고 부드러운 털 장식을 가방에 구겨 넣고 등교하곤 했다. 자의식 과잉의 날들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좀 변했냐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은 내게 관심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나는 여전히 튀지 않는 디자인의 옷을 입고 눈에 띄지 않게 걸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시선이 닿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를 증명한 실험이 떠오른다. 실험 참가자는 우스꽝스러운 티셔츠를 입고 여러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간다. 참가자는 자기 복장 때문에 꽤 주눅이 들었지만, 실제로 티셔츠의 프린팅을 기억해낸 사람은 전체 인원 중 10%도 되지 않았다. 결국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시선을 상상해가면서까지 나를 가두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셀프 억압의 전문가다.

아이만은 나처럼 남의 시선에 얽매이기보다는 마음껏 뻗대고 자유롭게 구르며 살기를 바랐다. 빨간 머리를 하고 싶다면 하고, 제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그러나 아이는 내 뱃속에서 내 안의 것들을 한껏 묻힌 채 나왔다.






한편, 여덟 살 딸아이의 팔에 쏟아지는 시선은 역지사지의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본인도 곧잘 누군가를 빤히 봐왔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번 일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애써 고개를 돌리거나 곁눈질함으로써 호기심을 숨길 수 있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노골적이어서 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사회 통념상 터부시되는 일이나 아이들은 그런 걸 잘 모른다. 휠체어를 탄 사람, 걸음이 불편한 사람, 형광 분홍색 머리를 한 사람, 특이하게 치장한 사람 등 생소한 모습에 집요한 시선을 보낸다.


한 번은 실내 수영장 샤워실에서 머리카락이 없는 중년 여성을 뚫어져라 쳐다봐서 무척 곤란했던 적도 있다. 들려오는 대화로 암 투병하셨다는 것을 짐작한 나는 아이의 시선을 돌리려고 몹시 노력했지만 아이는 몸을 틀어 그 사람을 본격적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내 몸이 뚫어지는 듯 진땀이 뻘뻘 났다.


수영장에는 다양한 몸이 있다.

옷과 모자 안의 다양한 몸들을 수영장과 샤워실에서 마주한다. 늙고 주름진 몸, 큰 흉터나 장애가 있는 몸, 탄력 있고 매끈한 몸, 배만 볼록 나온 몸, 물렁물렁한 몸, 단단한 몸… 일부러 훑어보진 않지만 저마다 다른 몸들은 내가 수영하며 만끽하는 자유 중 하나다. 수영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걱정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출산과 수유 후 생긴 부유방으로 볼록한 겨드랑이, 임신 소양증이 지나간 여기저기 거뭇거뭇한 흔적, 다리의 화상 흉터. 그러나 막상 씻고 수영복을 입고 물속을 거니는 동안 그것들은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저마다 옷에 갇혀 있던 독특하고 아름다운 몸들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어 씻고, 몸통 중앙만 가려주는 야박한 천 조각을 입고 헤엄치고 걷고 스트레칭한다. 그 누구도 호기심 어린 눈빛, 이상한 눈빛을 보내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 사람들이 유심히 보는 것은 그저 팔의 넘김이 부드러운지, 저항을 줄이는 효율적인 몸놀림인지, 발차기 박자가 빠른지 느린지 그뿐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마음이 편하다. 여러 가지 몸이 여러 모양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홀가분해진다.


길에는 레깅스를 입고 지나가는 여자의 엉덩이를 보며 혀를 차는 노인이 있고, 건물 계단에는 절뚝이며 걷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는 꼬마가 있으며, 버스 안에는 살이 아주 많이 찐 사람의 땀 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가 있다. 한 번도 전문 기관에서 비만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집에서는 곧잘 살이 쪘다는 말을 듣고 산 나는 여전히 55킬로그램이 넘어가면 우울해지는 무게 강박이 있다.

수영장 밖의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눈동자들은 답답하고 아찔하게 나를 옥죈다.


휴대폰을 여니 포털 사이트 메인에 “개그우먼 @@@, 걸그룹 뺨치는 각선미” 따위 제목의 연예 기사나 “붙이면 주름 올킬 미간 패치” 같은 광고 배너가 주르륵 이다. 걸그룹의 각선미는 어때야 하며, 가는 세월을 거슬러 주름을 올킬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이 장난감 통에 들어 있는 인형은 비현실적으로 가는 허리와 긴 팔다리를 한 채 누워 있다.

‘응당 그래야 하는 외모’를 떠들어대는 세상에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나 역시 열심히 노를 저으며 한배를 타고 있음에 당황한다.



황선우 김하나의 여행 에세이 <퀸즐랜드 자매로드>에는 호주 투움바 플라워 페스티벌을 소개하는 글이 나온다. 댄스 아카데미 어린이들, 각국의 이민자들, 유기 동물 보호 협회, 자기 농작물을 자랑하는 농부부터 아기와 노인들, 휠체어를 탄 장애인까지… 다소 소박한 차림새의 참가자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행진하는 다채롭고 평화로운 퍼레이드에 대한 묘사는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질 만큼 뭉클하고 따뜻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뽐내며 행진하고, 또 환호받는 장면이라니. 저자는 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어설프고 귀여워서 웃다가, 하도 웃어서 눈물이 났다. 눈물을 흘리다 보니 진짜로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젊고 아름답고 균질한 존재들만이 무대에 오르고 매 순간 엄격하게 평가받는 한국에서, 내가 가장 멀리 와 있다고 느낀 여행의 순간이었다. 꽃을 보러 왔다가 사람들을 봤다.”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날 아이를 생각하며, 그리고 아직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는 나를 생각하며 더 다양한 몸들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동요 없이 다양한 생김새를 바라볼 수 있기를. 어떤 모습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들 때까지 다양한 형태의 몸들을 길에서, 티브이에서, 패션쇼와 장난감 코너에서 볼 수 있기를.


그런 생각을 하며 하교할 아이를 데리러 나간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누런 얼굴에 톤업 선크림을 치덕이며. 왕복 단 오 분의 외출을 위해.

시선, 이놈의 시선.




*커버사진 출처: <퀸즐랜드 자매로드>(황선우,김하나), 이야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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