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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ug 17. 2022

내 안에 여전히 살아 힘이 되는 기억들

이옥선 김하나 <빅토리 노트>를 읽고

꼬맹이 시절의 아련한 기억 한 조각.

그때 내가 아팠는지 엄마는 흰 죽을 끓여주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기 밥 먹이게 좀 불러와." 앓아누워있었던 나를 불러오라고 오빠에게 말한 것이다.

애기? 나는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참기름을 두른 고소한 죽 냄새와 엄마가 앓아누운 나를 딱히 여겨 애기라 부르던 그 짧은 순간이 아직도 내겐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왜 사람마다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꽁꽁 언 날 홀짝이는 어묵 국물처럼, 쫄딱 젖은 날의 보송한 수건과 새 옷처럼 한 순간에 나를 녹이고 감싸안는 그런 따뜻한 기억. 내겐 엄마가 어엿한 어린이가 된 나를 아기라 부르던 목소리가 그렇다.


엄마는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나는 늘 엄마 손길이 그리웠다. 네 식구 건사하는 일에 바빴던 엄마였기에 몸만 큰 아기를 한가로이 어야 둥둥 쓰다듬을 시간은 사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하교 후 빈 집이 아닌, 간식 냄새를 풍기며 엄마가 나를 맞아줄 때 그 예상치 못한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 여덟 살 딸이 있다. 나는 엄마와 달리 시간적 여유가 있고 외동딸 하나라 어지간히 물고 빨며 지낸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아이 궁둥이를 두드리며 여전히 '울 애기'라는 말을 하루도 빠짐없이 내뱉는다. 참으려 해도 좀처럼 참아지지 않는다. 엄마의 마음도 이러했을 터. 경제활동과 살림, 육아로 바쁜 와중에 나와 오빠에게 느꼈을 벅찬 애정을 엄마는 어떤 언어로, 표정으로 엄마를 채웠을지 가끔 궁금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남은 기억이 별로 없고 좀 크고 나서는 엄마가 더 본격적으로 바깥일을 하셨기 때문에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최근 <빅토리 노트>라는 남의 육아서를 읽었다.

<말하기를 말하기>, <힘 빼기의 기술> 등을 쓴 김하나 작가의 어머니인 이옥선 저자가 딸을 낳고 만 오 년까지 쓴 육아 일기로, 수십 년 전 일기장에 펜으로 써 내려간 당시의 기록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책이다. 세월의 흐름으로 볼펜의 유분이 뿌옇게 번져 나온 흔적이 그 지난한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아 뭉클함을 더한다.


분유를 먹고 설사를 하던 것부터 배꼽의 염증, 황달 등의 신생아 기록으로 시작해서 아이가 앉고, 서고 말하고 고집을 부려 혼이 나고 유행가를 잘 부르게 되고 종일 바깥에서 놀다 들어오는 때까지 엄마의 일기가 담담하고도 세세하다. 직설적인 작가 스타일에 따라 아이와의 일들이 굉장히 간결하게 적혀있지만 고만한 아이를 키워본 나로서는 읽는 내내 당시 저자의 행복하고 피곤하고 또 놀라운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워서 울 줄만 알았던 아이가 일어나 바닥에서 발을 떼어 걷고 자기 생각을 갖고 본인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매일이 놀라움 그 자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건 엄마의 입장이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또 다르게 뭉클할 기록이다. 핏덩어리로 태어나 어엿한 어른이 될 때까지 나의 매일을 이토록 경탄하며 응원하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딸 김하나 작가는 엄마의 일기에 이런 코멘트를 달았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엄마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때다. 엄마와 나는 대화가 잘 통하고 대부분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가끔 서로 가치관이 크게 부딪힐 때가 있다. 조금 꿍한 마음으로 코멘트를 쓰다가도 자꾸만 반복되는 "엄마가 보기론 오히려 귀엽고"같은 문장을 마주칠 때면 마음이 몽글해진다. 엄마는 금복주에 모개에 침을 줄줄 흘리는 나를 이런 눈으로 봐줬던 사람이다. 1948년생인 엄마는 이때 겨우 서른 무렵인데 벌써 애 둘의 엄마이고, 남편은 나돌아 다니는 술쟁이여서 독박 육아를 하면서도 노트를 펴고 엎드려서 플러스펜을 꺼내 내가 귀엽다고 한 자 한 자 쓰고 있다. 그렇게 쓰인 글자가 내 눈앞에 있다. 45년이 지나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꿍했던 나의 마음은 너무 작은 것이 되어 어느새 형체도 없이 녹아버린다. 이 일기는 매번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놀라울 정도로 힘이 세다. 서른 무렵의 엄마는 이제 40대 중반이 된 나보다 훨씬 크다. _ 49p



내가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아기'라는 말을 앓아누워서도 똑똑히 들었던 것처럼, 마흔이  되어가는 나이에 아직도 마음속에  '아기' 되뇌며 사는 것처럼 이런 부모의 염려와 응원과 기대가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는지.  덩치만 커진 내가 어린 나를 키우던 엄마의 나이를 지나며  시절 젊은 엄마가 얼마나 용감하고 강했었는지 새삼 놀라곤 한다.


아픈 딸을 애달파하며 흰 죽을 끓이고 배숙을 달였던 엄마가 내게 있다는 것, 세상의 매운맛에 너덜너덜해지고 거친 풍파에 비 맞은 생쥐꼴이 되어도 내 안에 여전히 살아 힘이 되는 기억들.

남의 육아서를 읽고 이토록 마음 한편이 뜨끈해지는 것은 나도 그런 응원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형태는 없어도 마음속에 저마다의 기록이 있으리라. 말과 표정과 체온으로. 그 기억의 조각들을 기어코 불러 어루만지게 하는 책이다.


지금 엄마의 나이는 서른네 살이지만 이 노트를 받게 될 때 엄마는 쉰 살쯤 되겠지. 젊었을 시절의 엄마의 생각, 생활이 조금은 지각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낳아서 젖 물려 재우고 따로 서고 첫발을 내딛고, 기저귀를 떼고, 말을 한 마디씩 배우고, 글자를 익히고, 순간순간이 엄마의 기쁨이었고, 고생이었고, 가슴 두근거림과 놀람 그리고 보람이었다. 다시 한번 하나야, 잘 자라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깨닫고,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며 또한 만족함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_271p


저자의 마지막 일기에서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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