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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 Jun 28. 2024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듯한 사랑이 왔다.

여름이 오는 것을 질투해서 서럽게 우는 것 같은 봄 비가 지나가고, 청량한 하늘이 찾아왔다.

기지개를 쭈욱 켠 듯이 곧게 뻗은 초록 나뭇잎, 어딘가 미지근해진 바람, 짙고 뭉근한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이제 여름이구나.


이마와 뒷목으로 서늘하게 내려 앉는 땀을 닦아 내었다. 그래, 여름.

이제 귀에 지겹도록 울릴 매미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을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생각하며 지하철에 올라타 대바늘을 만나러 갔다. 사실 그가 저번 그림일기에서 대바늘이라는 표현이 없어서 다운그레이드된 줄 아는데 넌 여전히 대바늘이다.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났던 8월의 어느 날에서 해가 바뀌어 6월이 되었고, 그동안 일부러 지우고 있었던 취업의 고민을 하기 위해 받았던 직업적성검사에 충격을 먹은 것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그였다. 어떠한 결과든 간에, 네가 살아온 흔적이 나타나는 결과일 걸 몰랐냐는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이렇게 개판 오 분 전 일 줄은 몰랐지! 라며 소주를 삼켰다.


그래그래, 그래도 지금이라도 고민하는 게 장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알지? 난 삼십에는 이젠 해줄 말이 없다?


알지, 알아. 지금까지는 생각 없이 쭉 이어왔대도, 이제 앞가림을 잘해보려고 한다구.


대충 그런 맥락의 대화였다. 나보다 한 살 정도 많은 그였지만, 내적이든 외적이든 경험이 풍부하고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그였기에 그에게 달려갔던 이유였다. ‘숟가락으로 떠 먹여줘도 먹지 않는 게.’ 라며 타박해도 친구 해주는 기특한 사람. 그런 그가 나에게 한마디 더 던져왔다.


줄 곧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나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던진 말이었다.


있잖아, 네가 동물을 키우고 있어서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동물은 동물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구애를 덜 받고 네가 여행했으면 좋겠어. 네가 하고 싶은 여행이 있다면 해. 서른에 하는 거랑 스물아홉에 하는 거랑은 천지차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적당하게 기울인 술을 넘기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면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적당히 날이 선한 날에, 비가 오지 않을 날에. 부산으로. 그렇게 대단치 않은 명분인 생일이라는 것을 들먹이며 6월 17일에 기차표를 끊었다.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림일기를 그리기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된 친구가 있었다.

따듯한 말투를 가진 그가 좋아서 먼저 친구를 하자고 제안을 했었고, 그도 부산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행선지가 비슷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녁 한 끼를 먹자고 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불편해 보인다며 가방을 들어주는 사람, 다정하지만 어딘가 어정쩡하게 손목을 잡아 이끄는 사람, 모래가 가득한 광안리 해수욕장의 계단에서 자신의 옷을 깔개로 내미는 사람, 별로 신경 쓰진 않았던 상처투성이의 다리를 보며 약을 하나하나 발라주는 사람.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척 그를 바라봤다.


지금껏 이런 사람이 있었나?


뭔가 울렁거리는 마음을 꾹 누르고, 여행하는 삼일 내내 그의 곁을 머물렀다. 호감과 썸 그 사이 어딘가를 단숨에 유영해 버리는 것이 심장을 괴롭히는 일이었지만, 낯간지러운 단어들이 갑자기 톡 돋아올라올 때 마른침을 삼키고 그와 밤낮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약간의 얄미운 마음을 섞어 흔들 요량으로.


썸과 연애의 차이를 모르겠다며 조금 주춤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두려운 모양인 듯 했다.

겁을 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굳이 마음을 더 키울 생각은 없었다. 설렘이야, 시간이 지나면 휘발되는 것이니까. 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다시 말을 던졌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멈출게. 근데, 당장 보고 싶다던지 손을 잡는다던지는 하지 못해. 알겠지?


그 말이 더 싫었던 모양이었다. 주춤거렸던 마음을 확 당긴 건 오히려 그였다.


그럼 함께 할게.

너랑 발을 맞추고 함께 하나하나 하고 싶어.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그렇게 번갯불 콩 볶아 먹듯이 새 사랑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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