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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와 랄라 May 11. 2020

세상에 저주받은 몸은 없다

몸매 강박을 버리니 비로소 나를 꾸밀 수 있게 됐다

작가  『김랄라』

꾸미다

‘나다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행위. 단, 아름다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자유다.



어느 시대에나 여성에게 아름답다고 하는 특성은  시대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여성의 행동을 상징할 뿐이다.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나오미 울프 )


세상에는 보고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우연히 보게 된 엄마의 대학시절 사진이 그러했고, 가장 최근에는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 설경을 넋 놓고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잠시 취할 수 있었다. 이제껏 본 아름다운 것들은 겉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어쩌다 한번 모습을 빼꼼 비출 뿐. 스스로 아름다워지려 하지 않았기에 집착하는 법도 없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집착’의 대상이 되거나 ‘욕망’ 그 자체이다. 무엇이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고 있을까. 최근에 읽은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저자 나오미 울프)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여성이 법적·물질적 장애를 돌파할수록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는 더 엄격하고 무겁고 무자비하게 여성을 짓누르며, 여성에게 통제력을 발휘하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에 관한 낡은 이데올로기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돈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 집단이 그들의 위치와 지위를 유지하기 쉬운 방향으로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아름다움’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아름다움의 신화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생물학적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오늘날 아름다움의 신화가 여성을 제약하는 것은 권력구조와 경제, 문화가 여성에게 반격을 가할 필요에 의한 것이지 결코 그보다 숭고한 목적에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은 사회활동을 위한 자격 요건으로 남성들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메이크업이나 정숙한 복장을 강요당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들에게는 꼭 외모에 대한 수식어가 붙으며 얼굴과 몸매를 평가당한다.


최근 드라마 제작이 확정된 네이버 인기 웹툰 <여신강림>에서는 10 여성의 얼굴과 몸매를 적나라하게 평가할  아니라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구도를 강조하는 서사 구조로 비난받은  있다. (출처 | 네이버 웹툰 <여신강림>)



나에게도 마르지 않은 몸매 때문에 스스로를 부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줄곧 마른 신체를 유지해오다가 중학생 때 초경을 하면서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했다. 얼굴과 다리에 붙은 지방은 출렁거리고 몸무게 앞자리가 변하자 왜인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곧바로 신체검사 날을 디데이로 잡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무조건 적게 먹고 무작정 운동장을 뛰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단순한 관용구가 아니라 실제로 목구멍에서 피맛을 여러 번 경험했다— 신체검사 날에 목표했던 체중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체중이 1kg만 증가해도 강박을 느끼고 밥을 먹지 않았다. 금식한 다음 날은 폭식으로 이어졌다. 건강하지 않은 식습관을 이어가자 나의 체중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거울 속에 비친 내 몸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원래 나의 몸이 아니야. 이런 몸으로는 평생 불행할 거야.’ 그때 당시 내 키가 164cm, 체중이 58kg이었다. 과체중도 비만도 아닌 ‘표준’ 체중. 하지만 마른 몸을 위해 다이어트를 쉴 틈 없이 강행했다.


사실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또래보다 큰 키와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주변 어른들은 “랄라는 키도 크고 비율도 좋으니까 커서 미스코리아에 나가면 되겠다”, “랄라는 다리가 예쁘니까 치마가 잘 어울리겠어” 등의 말들을 많이 하곤 했다. 나는 치마보다 편한 바지가 좋았고 치장하는 것보다 밖에 나가 뛰어노는 걸 좋아했지만 배구선수나 농구선수를 추천하는 어른들은 없었다. 살이 붙고 나서는 “어렸을 때는 예뻤는데 지금은 아니다”, “언제 살을 뺄 생각이냐”와 같은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심지어 “저주받은 하체가 됐다”라는 조롱 섞인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체중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체중이 증가할수록 더 많은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원푸드 다이어트, 덴마크 다이어트, 줄넘기 다이어트 등 이 세상의 다이어트란 다이어트는 모조리 하기 시작했다.


몸매 강박이 심했던 중학생 시절에 쓴 다이어리에는 ‘다이어트’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몸매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부터였다.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만 해도 풋풋한 새내기로 보이고 싶어 또다시 다이어트를 열심히 했지만 몸무게가 줄어드는 건 잠시 뿐, 대학에 가니 오히려 체중이 계속 불어났다. 캠퍼스에는 모두 나보다 날씬하고 예쁜 학우들만 있는 것 같았고, TV에는 점점 더 마르고 귀여운 아이돌들이 나와 춤을 추고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몸매는 점점 더 가늘어져 가는데 내 살집들은 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로 ‘GO’ 대신 ‘STOP’을 외쳤다. 애초부터 55 사이즈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왜 55 사이즈가 되고 싶어 했지?’ 하루는 만취 상태로 엄마에게 “나 이제 다이어트 따위 하지 않을 거야. 그냥 내 마음대로 살 거야!”라고 선언했다.(그런 나에게 엄마는 주정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고 했던 것 같다.)


몇 년간 계속해오던 애증의 다이어트를 포기한 뒤 나는 더 불행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살이 찔까 봐 걱정하며 음식을 먹지 않게 되니 한 끼의 식사도 행복하게 즐길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신체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 처음으로 나의 몸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고 노력했다. 내 몸을 긍정하려고 하니 옷을 살 때도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30이 넘는 허리 사이즈가 부끄러워 옷 사는 것을 기피하곤 했었는데... ... . 또 내가 운동을 꽤 좋아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학창 시절에는 살이 출렁거리는 것을 들킬까봐 되도록 소극적으로 움직였다면 이제는 살이 출렁거리든 가슴이 덜렁거리든 자유롭게 팔다리를 휘젓는다. 수영복 입는 게 부끄러워 도전하지 못했던 수영을 시작했고 대중목욕탕에도 당당히 다녔다. 남들이 예쁘다고 하는 옷 대신 나만의 스타일을 고민해보기도 했다.


현재 옷을 살 때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바로 ‘활동하기에 얼마나 편한가’이다.(두 번째는 가격)


2017년 국내 출판된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러네이 엥겔른)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자신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 우리의 돈과 시간을 다르게 써야 한다. 우리의 몸은 더 건강해져야 한다. 이제 여성은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저 넓은 세상에는 봐야 할 것이 아주 많다.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

몸매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진짜 ‘멋’을 찾은 기분이다. 이제는 얇은 스키니 바지에 내 다리가 들어가지도 않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덤덤하게 내려놓고 다른 바지를 찾으러 가면 되니까. 거울 앞에서 내 몸을 보며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럴 시간에 밖에 나가 운동을 하며 한바탕 땀을 흘리고 온다. 요즘에는 근육을 만들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겨 아침, 저녁으로 유산소와 근력운동을 병행하며 살고 있다. 건강하게 변화해 가는 몸과 마음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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