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아와 랄라 May 11. 2020

마른 여자라는 타이틀

편한 게 잘못인가요

작가  『김미아』


꾸미다

사회에 무난히 편입되기 위해 하지만, 누군가에겐 나를 찾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는 행위. 꾸밈 노동 이후에 오는 타이틀에 집착할 경우 여성의 발목을 잡는 1순위 요소이기도하다.


진짜 독하다 독해.


인생에서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던 중학교 시절, 오래 달리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 다른 마른 아이들을 제치고 1등을 하니 같은 반 남자애가 내게 한 말이었다. 반에서 꽤 덩치 있는 여자 포지션이던 나는 열심히 달리기를 했으나 돼지가 잘 달린다는 얘기, 독하단 얘길 들었다.

와, 말랐는데 어떻게 달리기도 잘해?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말랐던 고등학교 시절, 마찬가지로 오래 달리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내게 말랐는데 달리기'도' 잘하는 아이라고 치켜세워줬다. 그저 달렸을 뿐인데 내가 듣는 평가는 이렇게나 달라졌다. 단지 몸무게 앞자리가 바뀌었다는 이유 만으로.


사실 떠올려 보면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던 때도 과체중 정도였다. 질병으로서의 비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국 15kg을 감량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진 못했다. 이틀에 한 번씩 쌀알들을 먹어가며 2주 만에 뺐기 때문에 지방뿐만 아니라 근육도 빠져 버렸다. 그 짧은 시간에 뼈도 약해졌다. 그건 다이어트가 아니라 굶어 죽더라도 마른 여자가 되겠다는 광기 어린 행위였다. 한창 성장기였던 중학교 3학년 때 극단적 감량을 한 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참고로 고성 라벤더 밭입니다. 예쁜 척 중입니다.

예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불편하게 꽉 붙는 옷을 입고 그다지 관심 없는 인스타 핫플레이스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포즈도 취하며 온갖 예쁜 척을 해댔다. 근력이 전부 빠져버리는 바람에 체력은 바닥을 찍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예쁜 여자인 척하고 오면 체력이 방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이상하게 보이면 어쩌지', '틴트 이에 안 묻었나'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살을 빼면 끝날 줄 알았는데 더 튼튼한 밧줄이 나를 옥죄었다. 나가면 하루 종일 예쁜 척을 하고, 집에 있을 땐 어떤 옷을 입을지, 내 퍼스널 컬러는 무엇인지 파고들었다. 도서관에 갈 때도 꾸몄다.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에게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구는 있었다. 자기만족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실은 아니었다. 이번엔 마르고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다.


퍼스널 컬러에 맞춰서 화장을 하고, 보라색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에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옷을 입지 않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가장 많이 파는 옷을 통계 내서 세상에 편입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피팅 모델 사진 1000장을 저장한 후에 통계를 내어 옷을 샀다. 내게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일단 끼워 맞췄다. 화장품도 세트로만 사고, 시키는 대로 화장을 했다. 나는 점점 사라지고 화장하고 꾸민 한 여성만이 남아있었다.


화장을 한 날에는 '미아 오늘 좀 꾸몄네'라는 말, 화장을 안 한 날에는 '대학이 많이 편해졌나 보네?'라는 얘길 들었다. 그걸 말한 사람들은 모두 화장을 하지 않고 면도만 겨우 한 남자들이었다. 꾸미지 않은 날에는 내 이름을 복학생 남자 이름처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단지 얼굴에 1mm도 되지 않는 색을 얹었을 뿐인데 이름이 두 개가 되었다. 그게 내 잘못인 줄 알고 살아왔다. 편한 게 잘못인 줄 알고.

거리낌 없이 터벅터벅 걷고 운동할 수 있는 옷, 안경, 온전한 내 얼굴

그렇게 불편하게 입고, 먹고, 꾸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무렵에 랄라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다운 색깔, 편한 옷,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단순한 예쁨이 아닌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모두가 랄라의 에너지를 좋아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얼굴을 보면 '예쁘네'와 같은 평가가 아닌, '에너지가 있네'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 나이고 싶었다. 사실은 촌스럽고 먹는 걸 좋아하고 렌즈는 불편한 나. 웃긴 표정 짓는 걸 즐기는 나.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는 나. 밥 먹고 나면 틴트가 지워졌나, 칼로리는 얼마일까 걱정하는 게 아닌 '정말 맛있었다'하고 배를 툭툭 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미의 기준 같은 건 없다고 스스로를 북돋으며 때때로 화장을 하지 않고 학교를 가고 부스스한 머리 스타일 그대로 밖엘 나서며 나를 찾아갔다. 그 길의 끝에는 '꾸미는 걸 좋아하지 않고 편안 상태로 솔직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나'가 서있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난 후, 이젠 화장하지 않고 나서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 껄껄 크게 웃는 것도 무섭지 않고 배가 나오면 툭툭 치는 행위가 즐겁다.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선 화장을 하며 코르셋을 조여매기에 '저 자유로워요!'라고 할 순 없지만 1g의 나를 찾은 것은 분명하다. 그 1g이 사회에서도 자연스레 받아들여질 수 있길, 나처럼 두려움에 화장을 하는 이가 없길, 다이어트란 명분 아래 굶어 죽어가는 이가 없길.

이전 06화 우리는 서로의 양육자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