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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와 랄라 May 18. 2020

K-장녀에게 양보를 논하지 말라

오늘도 남동생과 집안일로 말다툼을 했다

작가  『김랄라』


나누다

행동의 주체와 객체 모두 잃는 것이 없을 때 성립할 수 있는 행위.   


내게는 피를 나눈 연년생 남동생 하나가 있다. 대학생이 된 후 서로 떨어져 살다가 내가 퇴사를 하고 동생은 수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엄마의 집에 함께 지내게 됐다. 백수인 나의 요즘 최대 고민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과 안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 어릴 때는 같이 놀고 서로 의지하며 지냈는데 지금은 그저 호적 메이트일 뿐이다. 동생과 나는 성격부터 식습관, 라이프 스타일, 관심사까지 신기할 정도로 하나도 맞지 않는다. MBTI도 각각 ENFP와 ISTJ. 쉽게 말해 상극 중에 상극이다.     


최근 나와 동생이 가장 많이 부딪히는 원인은 바로 집안일이다. 나와 동생은 엄마의 집에서 셋이 함께 살고 있는데 셋 중 유일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당연히 집안일은 백수인 나와 수험생인 동생이 분담해야 한다. 우리는 공평하게 집안일을 분담하기 위해 규칙을 만들었다. 서로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을 모아 집안일을 나눠하는 것이다. 대신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내가 일을 조금 더 많이 한다는 조건에 나 또한 불만 없이 동의했다. 내가 점심 식사를 준비하면 동생은 저녁 식사를 맡고, 내가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리면 동생이 다 된 빨래를 넌다.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청소를 하고 화장실 청소는 돌아가며 한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집안일을 하고 있지만 서로에게 불만은 늘 있다.  


-(분리수거   재활용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내   닿게 한 번에 제대로 하라고!

-누나가  정도는 해줄  있잖아!


사실 내가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누가, 얼마나 집안일을 많이 하냐가 아닌 동생의 태도이다. 나 역시 수험생인 동생에게 집안일을 정확히 반반 분담하게 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동생보다 일을 더 많이 맡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을 조금 더 많이 하겠다고 했지, 집안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내가 맡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누나로서 나에게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하는 동생의 태도가 나는 늘 불만스럽다.                      

You must remember. (출처 트위터 캡쳐)

최근 트위터에 올라온 ‘K-장녀’에 관한 글을 보고 문득 예전에 본 드라마 하나가 생각났다. 2017년 tvN에서 방영한 <이번 생은 처음이라>(극본 윤난중, 연출 박준화)이다. 겉으로는 드라마 보조 작가인 ‘홈리스’ 지호(정소민 배우)와 IT업계 수석 디자이너인 ‘하우스푸어’ 세희(이민기 배우)의 현실적인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한국의 결혼제도에 대한 고찰과 거주지에 대한 청년들의 현실적인 문제, 무엇보다 K-장녀의 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Korea의 ‘K’를 장착한 K-장녀는 가부장제 속에서 희생과 양보, 정숙을 강요당한 대한민국의 장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지금은 듣기 힘든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에서 가부장제 속 그들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드라마 속 지호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동생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자란(심지어 자기 생일날 초 한번 제대로 불어본 적 없다) 그녀는 부모에게 그저 공부 잘하는 착한 딸이다. 서른이 돼서도 지호는 남동생의 갑작스러운 결혼 때문에 자기가 살던 집까지 양보하며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집까지 잃게 된다. 지호는 그런 자기 자신을 ‘수비수’라고 표현한다. “공이 오면 받아칠 용기도, 그렇다고 피할 깜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수비수. 생각해보면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의 공격수였던 적이 없었다”라고.

누나 생일에 지가 촛불 끄는 눈치 없는 남동생(출처 구글 ‘이번 생은 처음이라’)

나 역시 장손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양보라는 선의의 이름으로 내 몫을 많이 잃어버리곤 했다. 다행히 나의 엄마와 아빠는 나와 동생을 차별하며 키우지 않았고 누나로서 희생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내게 장녀의 역할을 강조한 건 언제나 일부 친척 어른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어렸을 때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가끔 ‘양보’와 ‘손해’가 같은 뜻이 아닌가 헷갈릴 때가 많다. 양보는 분명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미덕(美德) 중 하나인데 말이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날이 있다. 가끔 예상치 못하게 답을 찾기도 하는데 오늘 나는 설거지를 하며 한 가지 답을 찾았다. 강요에서 나온 양보는 선행이 아닌 빼앗김이라는 것을. 양보의 과정에서 억울함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양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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