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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6화_혐오삭제의 방식

by 권도연

조수경은 흰색 벽을 바라보았다.


교육실 벽면 전체를 덮은 무광 페인트는 감정을 지우려는 의도가 담긴 듯 평온하고 무표정했다. 벽이란 원래 표정이 없는 것이지만, 이 공간의 그것은 특히 무심했다. 심지어 음향 반사를 죽이기 위해 부착된 흡음 패널조차 감정을 흡수해 삼켜버릴 듯 보였다.


이제 여러분 각자의 감정을 기록하는 시간입니다. 이 카드를 받아 적어주세요. 방금 느낀 감정, 그리고 그 이유.


수경이 익힌 상담 심리학의 기본은 ‘자신을 돌아보기’였다. 기본이지만 가장 기초적이기에 힘든 일이었다. 감정을 기록한다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괴물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혐오라는 감정 뒤에 숨은 두려움, 공포 뒤에 도사린 외로움, 분노 속에 웅크린 슬픔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분노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실은 어렸을 적 타인에게서 받은 깊은 상처였고, 무관심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절망인 것을 마주한 인간은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예외없이. 하지만 수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조교가 참가자들에게 카드를 나눠주었다. 열세 명의 혐오자. 표면상으로는 혐오 감정 재활 대상자, 그러나 행정상 분류는 ‘정서 위기군’이었다. 이들은 누군가는 남성 혐오로, 누군가는 노인 혐오, 또 누군가는 종교 편향 발언으로 여기에 수감되었다. 처벌이 아니라 ‘지도’라는 이름 아래, 비자발적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수경은 아까부터 까닭모를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다. 이상했다.


다 적으셨나요?


수경이 묻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은 빠르고도 일관되었다. 너무 일관된 것, 예외없이 기계로 찍어낸 듯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 모두 이질적이었다. 보통은 머뭇거리거나 짜증을 내거나, 일부러 빈 칸으로 내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 조용했고 또 이상하리만치 순응적이었다. 수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김민지 씨.


조수경이 앞줄에 앉은 여성을 지목했다.


오늘 감정은 어떻게 적으셨죠?


민지가 수경의 질문에 자세를 곧추 세우며 대답했다.


감정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 시간엔 분명 ‘분노’라고 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오늘은 없습니다. 안정적이었습니다.


민지의 말은 매끄러웠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그건 ‘감정이 사라진 사람의 말투’였다.

수경은 직업적으로 감정 억압과 억제를 수백 번 분석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억제라기보다는 비워진 깡통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수경은 이후에도 최형미와 김병기 등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의 대답은 민지와 다르지 않았다. 감정이 없다. 난 안정적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실습이 끝난 후, 수경은 복도에서 조교를 불렀다. 소영은 경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석사과정 1년차로 수경보다 한 살 어렸다. 둘의 인연은 지도교수인 박 교수를 통해 시작되었다. 소영은 학부 시절부터 박 교수의 연구실을 드나들며 범죄자의 심리 분석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수경 역시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이였다. 비슷한 관심사와 나이 때문인지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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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내 커뮤니케이션과 리더십을 주제로 글을 쓰고,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관찰합니다. 실무자 중심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으며, 경험과 감정의 언어를 잇는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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