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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너는 나처럼 살지마>

by 권도연



결혼 전에는 형제들과 늙은 부모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그리고 여전히 남은 형제들에게 희생적이기만 했던 엄마는

칠십이 넘는 지금도 온몸이 마비될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자신보다 끼니를 거르는 남편이, 일하는 아들이, 회사에서 치이는 딸이 걱정이다.


그녀는 서울의 유명 여자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한 수재였지만, 평생 손에 물 안 묻히게 해주겠다는 아빠에게 속아(?) 교단에 한 번 오르지 못하고 평생 지문이 사라지도록 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딸이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아시아유럽재단 장학생이 돼 기어이 자신이 가보지 못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처음으로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서 편지 하나를 건넸다. 줄줄이 적힌 문장들 중 몇 번이고 곱씹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너는 나처럼 살지 않을 거 같아 다행이야. 잘 커줘서 고마워 내 딸."



이후 나는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때려치고, 또 다른 걸 하다 때려치고, 지금은 본업에 사업, 글도 쓰고 있으니 닥치는 대로 마음대로 하고 또 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넉넉한 형편으로 '우동 먹으러 잠시 일본 다녀올게' 수준의 멋진 인생은 아니었고, 꿈꾸는 것이 있으면 그 꿈을 위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그 하나만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유와 여력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다 그녀 덕분이다. 엄마는 내가 뛰어오르느라 비어버린 그 자리를 묵묵히 채워주었다. 마치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는 평생 노예처럼 모든 것을 나에게 맞춰서.

하지만 그런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 자신, 나의 마음상태였다.



지난 9월 28일, 하릴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다 독한 기사를 하나 보았다.



한국의 자살률, 전 세계 1위.



새삼스러울 것 없는 기사였지만, 11년만의 최고치, 다른 나라의 3배에 달한다는 수치에 가슴이 저렸다. 계산에 따르면 하루에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40명이나 된단다. 거기에 ‘자살이 구제책이 될 수 있다’에 동의한다는 사람 30%, ‘자살이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일 수 있다’에 동의하는 사람 역시 30%라니. 믿기 어려웠다.



나는 자살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대학교 시절 친척이, 서른 살 때에는 가까운 지인이, 그리고 마흔 살이 넘은 어느 해엔가는 사회 초년 시절 같이 글을 쓰던 선배가 우울과 절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그들은 오랜 시간 우울을 앓았다. 매일이 절망이었고 불안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런 사람이다. 나는 태초에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어제도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산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딸아이가 나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타인의 행동과 마음을 묘사할 수 있는 여덟 살이 되면서 내게 비슷한 유형의 질문을 매일 하고 있다.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선 나에게 “엄마 왔어?” 다음으로 쪼르르 달려와 하는 말, 침대 위에서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워 이제 자자 하는 내 말에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이 다 이랬다.



"엄마, 왜 사람들은 날 싫어할까?"

"엄마, 나는 친구들과 다른 것 같아."

"엄마, 나는 왜 매일 울고 싶을까?"



아이다운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 아이의 생각과 걱정이 마흔세 살인 나와 너무도 똑같아서 처음에는 놀라고 이제는 걱정에 혼자 속앓이 중이다.



라라는 매일 매 순간 걱정하고 눈치 보고 생각하고 또 그 생각을 곱씹고 있다. 갓난아이일 때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한 번 울음이 터지면 그 슬픔의 잔열이 아이를 힘들게 하는지 오랜 시간 칭얼대고 아파하더니. 설마했는데, 역시. 넌 나를 정말 많이 닮고 말았네.

유일한 나의 피붙이인 라라는 가장 닮지 않았으면 했던 나의 성격적 경향과 기질을 그대로 가져가 버렸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처음에는 부정했다.

라라는 너무 어려. 겨우 8살이잖아.


라라의 질문이 많아진 순간부터는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런 생각 할 필요 없어.

누르고 무시하고 애써 외면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가 또 다시 내게 와


"엄마, 왜 난...?"

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도대체 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왜 그렇게 너 멋대로 생각하고 착각하는 거야?"



인간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가장 혐오한다. 그래서 나는 가장 소중한 아이에게 가장 소중하게 다뤄야 할 문제를 가장 가벼운 방식으로, 제멋대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며칠을 가슴을 뜯으며 후회했다. 나도 잘하지 못하는 걸, 아이가 할 수 있었겠냐고. 도대체 넌 엄마가 돼서 뭐 하는 거냐고. 너랑 똑 닮은 아이에게 도움은 못 될망정 상처를 주냐고.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다짐했다. 다음번부터는 아이에게 예전과는 다른 답을 줘야겠다고. 설령 답이 아니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한 말을 해줘야겠다고. 그래서 오래된 심리학 책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심리학을 전공했다. 당시 대학은 사회과학대학이라는 학부로 입학해 1년 동안 전공 관련 기본 수업들을 들은 후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무리가 전부 경제학을 선택할 때 나만 유일하게 심리학을 선택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취직 어려워. 너 나중에 굶어 죽을 거야?"


나는 그 당시에도 지독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굶어 죽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이해되지 않은 불행들을 겪으면서 '왜 하필 나만 이래?!'라는 자책과 후회와 번민이 내면에 너무 가득해, 그 이유를 공부를 통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학부 전공 이후에도 독일에서 유학하며 커뮤니케이션 학위를 따는 내내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이론과 사례들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조금씩 나의 오랜 질문에 대한 대답의 가능성을 조금씩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왜 사소한 것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왜 남들보다 뚜렷한 이유 없이 전전긍긍하는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는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더 이상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는다.

왜냐, 나의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유를 안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고 착각이니까. 우울과 불안 등의 감정은 절대 치료되지 않는다. 그저 같이 사는 거다. 그저 느끼는 거다. 그래도 괜찮게 살아가는 방법은 너무도 많다.


특히 마음의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나는 이를 기술이라 부른다—을 익히고 마음의 근력을 키우면 꽤 살만하다.

그 기술은 별 게 아니다. 삶은 너무도 괴상하고도 신비로워서 괴로움 덕분에, 오히려 그 망할 우울감 덕분에 행복과 빛을 발견하게도 된다. 내가 그랬다.



나의 딸인 그녀가, 고작 8살 밖에 안된 그녀가, 부디 더 크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다.

방문을 꾹 걸어 잠그고 엄마아빠의 질문에 "귀찮아, 싫어"만 반복하는,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데가 없어 커뮤니티나 메신저에서 타인을 찾는다는, 열 살의 이른 사춘기가 오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다.

동시에 요즘 더 심한 불면증과 불안증에 시달리는 나의 오춘기의 방향을 찾아서 천만다행이다.



그녀에게 하는 말은 모두 그녀를 위한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부디 엄마가 내게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던 것처럼,

나는 나의 딸이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씩 짬을 내 글을 쓰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착한 말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녀는 분명, 나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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