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처럼 살지 마>
라라는 마케팅 정 팀장과 통화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서 있었다.
“…그래서 팀장님, 관련 내용 링크 보내드릴게요. 참고하시고,.. 잠시만요. 라라, 왜?”
전화를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묻는 내게 라라는 계속 통화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 모양새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나는 픽하고 웃고 말았는데 아이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그 바람에 나는 정 팀장과 더 이상 얘기하지 못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했다.
“엄마, 난 만날 혼자야. 예지는 나랑 안 놀아. 가령이랑만 논다니까.”
라라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금세 울음으로 번졌다. 많이 억울한 듯했다. 친구 문제는 유치원 때도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을 가진 부모라면 격하게 동감할 것이다. 여자 어린아이들에게 친구의 존재는 매우 각별하다. 아이의 말로는 ‘반짝 친구’, 우리 말로는 ‘단짝 친구’가 여아들에게는 목숨만큼 소중하다.
라라에게 예지는 ‘반짝 친구’다. 하지만 예지에게 아니었나 보다. 흔한 일이지 않은가. 양방 사랑보다 짝사랑이 훨씬 더 많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는 확률은 극히 낮다는 거. 그러니까 모든 노래가 사랑이고 아픔이고 상처지.
라라는 예지와 짝이 돼서 쎄쎄쎄도 하고 실뜨기도 하고 급식도 먹고 보건실도 가고 싶었는데 예지는 가령이란 아이가 더 좋았던 거다. (감히라고 쓰고 너무 이기적 단어이니 괄호 안에 넣는다) 우리 라라가 아닌 가령이라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라는 이런 표현도 썼다. 서운해. 외로워. 난 혼자야.
아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실망감과 소외감, 특히 친구에 대한 소유욕과 관련된 문제는 성장 과정에서 아주 당연하고도 흔한 문제다. 하지만 같이 따라오는 아이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른이 보기엔 친구 사이의 그저 흔한 작은 충돌이겠지만 라라에게는 ‘나라는 사람이 거절당했다’는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 라라는 이미 상처를 받았다. 아이는 그날 밤 자기 전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난 만날 혼자야, 나만 늘 외로워”를 외쳤다.
발달심리학자 볼비(John Bowlby)의 애착이론에 따르면 아이는 관계 속에서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기본 질문을 던지며 자란다. 부모 다음으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동년배 친구다. 부모를 통해 일방적 사랑과 보살핌을 받다가 친구와의 관계에서 거절을 경험하면 아이는 자연스레 이 질문의 답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구나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
부모로부터 받는 절대적인 사랑과 일방적인 돌봄은 영원할 수 없다. 일차원적이고 희생적인 관계는 인간을 건강하고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시키지 못한다. 아이는 이것부터 깨달아야 한다. 사회로 나와 타인과 어울려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고 건강히 살기 위해서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인식이자 관계적 자기 성찰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타인이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거라고, 이해하고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거대한 오만이자 착각이다.
유명한 광고처럼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단연코 없다.
‘이심전심’이란 말도 환상이다.
세상에, 인간은 인간 자신마저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 말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남이 어찌 알겠는가.
심리학 이론 중에 계획오류(planning fallacy)란 것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자기 능력을 과신해 과제 완수에 걸리는 시간을 터무니없게 적게 잡는 성향을 일컫는 말이다. 자기 자신도 어찌할지 모르고 착각하는데 타인은 오죽하겠는가. 혹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뇌나 의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그저 느낌 상, 오감으로 혹은 육감으로 ‘체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라라는 예지에게 “나도 같이 놀고 싶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만 기대했을 것이다.
'예지는 내 마음을 알겠지. 내가 서운한 걸 느끼겠지. 내 마음도 그러니까.'
아니, 절대. 모른다. 남이다.
모르는 걸 안다고 생각하니 남는 건 오해와 갈등이다.
나는 라라에게 넌지시 얘기했다.
“예지에게 말해보지 왜. 같이 놀자고.”
“꼭 말을 해야 해? 구지구지해.”
“구지구지?”
“엄마도 그런 말하잖아 아빠한테. 그런 거 하나하나 말해야 해? 구지구지해 라고 했잖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언제 구지구지하다고.. 설마?!
“구질구질하다고?”
“맞아 두 번 쓰는 말이었어.”
아무튼. 지금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친구에게 표현하는 걸 ‘구질구질하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구질구질하다. 형용사_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바르지 못하고 찌질해 보일 때.
나는 라라를 무릎에 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라라야, 네 마음은 네가 말하지 않으면 예지는 모를 수도 있어. 예지랑 놀고 싶으면, 그걸 말해야 해. ‘나도 같이 놀자’라고.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그건 구질구질한 게 아니야. 멋진 거지.”
라라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친구에게 놀자고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 듯싶었다.
하지만 어른인 우리는 너무도 잘 알지 않는가. 인간관계의 시작은 이런 구차하고 구질구질함을 무릅쓰고 내 마음을 표현할 때다.
사회심리학자 올포트(Gordon Allport)는 관계의 깊이를 설명하면서,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이 친밀감을 만든다고 말했다.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 상대와의 관계는 ‘표면적 관계’에서 ‘심리적 관계’로 이동한다. 아이가 “같이 놀자”라는 짧은 말을 건네는 것도 결국은 자기 노출의 훈련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기대하는 대신 내가 먼저 표현하면 된다. 노력도 하지 않고 타인이 그래주길 원하는 마음 대신 말하는 용기를 내면 심리적 여유가 생긴다. 인간의 심리란 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표현하는 방법으로 건강해지는 법이니까.
“난 만날 혼자야.” 이 말은 사실 “난 너와 함께이고 싶어”라는 갈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 갈망을 솔직히 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외로움은 줄어든다. 여기에는 사회적 비교 이론(Festinger)도 숨어 있다. 라라는 예지와 가령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비교했고 그 비교가 ‘나는 혼자다’라는 인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비교는 언제나 외로움을 키운다. 비교를 멈추고 원하는 관계를 직접 요청하는 순간에야 비교의 악순환이 끊어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서로의 마음이 똑같을 수 없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내 마음은 내 안에 있고 네 마음은 네 안에 있다. 타인과 나는 결코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진짜 연결이 시작된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던 라라는 내게 속삭였다.
“그럼 내가 예지한테 말해볼까? 나도 같이 놀자고.”
나는 미소 지으며 라라의 등을 토닥였다. 라라가 품에 안겼다. 아이의 심장이 작게 콩닥거리고 있었다.
어릴 적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
선생님이 짝을 지어 뭘 하라고 했는데 하필이면 친구가 결석을 해서 혼자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거야.
그날은 하루뿐이었지만, 어느 날은 내 단짝에게 친구가 생겨서 혼자 남겨진 일이 정말 많았어. 창피하고 무안하고 속상하고 울고 싶었지. 근데 그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 회사에서 혼자 밥을 먹어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하고, 남들 다 모인 공간에서 말 섞을 사람이 없어서 오도카니 혼자 외롭게 앉아 있었던 적도 많아.
이제 엄마는 얘기 나눌 사람이 필요할 때, 너무 외로울 때는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해. 그들은 일부러 내게 다가와주지 않아. 내가 먼저 가야 해. 아무 말이라도 해.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가끔은 오늘 옷이 참 예뻐요.라는 말도. 아까 엄마가 통화하던 사람, 정 팀장도 그렇게 해서 사귄 사람이야. 그날 라라가 좋아하는 라벤더 꽃이 그려진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얼마나 예쁘던지. 정 팀장은 자신이 마음먹고 산 블라우스를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아서 조금 속상했었대. 근데 엄마가 말을 거니까 너무 좋았고 고마웠단 거야. 그래서 바로 친해졌어. 신기하지?
내일은 라라가 예지말고 다른 친구들을 한 번 봐줬으면 좋겠어.
혹시 누가 혼자 앉아 있지는 않은지, 한 번도 말해보지 않은 친구의 마음은 어떤지.
옛날의 라라처럼 누구에게 말도 건네지 못하고 홀로 끙끙대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네가 친구가 되어줘.
그럼 이제 앞으로 너는 영원히 혼자될 일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