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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da Mar 27. 2024

슬픔의 모퉁이

지난가을, 한동안 거실 바닥에는 수십 개의 퍼즐조각이 펼쳐져 있었다. 유니콘의 분홍빛 뿔 한 조각, 공주의 동그란 눈 한 조각, 반짝이는 별 한 조각, 푸른 바닷물 한 조각, 잘린 나뭇잎 한 조각... 아이가 등원하고 아무도 남지 않은 집은 금세 조용하고 넓은 집으로 변모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엌 식탁에 털썩 앉아 그 퍼즐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스텝 4, 4살 아이의 퍼즐이지만 72개의 조각들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가 손은 대지 않고 그저 머리만으로 상상을 하며 퍼즐을 맞추어 본다. 이윽고 나의 감정들이 수십 개의 퍼즐조각으로 살아나 바닥에 흩어졌다. 내 감정이 물든 일상을 어렵게 주워 모아 최대한 굴곡이 작은 모퉁이의 조각들부터 천천히 하나하나 붙여본다. 남편과 크게 다투게 되었던 사소한 대화 한 조각, 오랜 시간 아파 결국 입원한 엄마의 허리수술 한 조각, 나를 따듯하게 안아주는 작은 아이의 동그란 두 손 한 조각, 간소히 차려낸 저녁밥상 한 조각, 좋아하는 가수 루시드폴의 새 앨범을 듣는 위로의 한 조각, 존재 하나가 별이 되었다는 뉴스 한 조각... 어느새 손대지 않고 완성된 퍼즐의 제목은 아마도 '슬픔'일 것이다.          


11월의 어느 아침, 조금 일찍 일어난 아침은 식사시간이 여유롭다. 딸아이가 주먹밥을 요청해 간단하게 만들어 핑크빛 접시에 담아내었다. 뚝딱 만들어지지만 대신 동그랗게 만들 때 지름이 1.5cm 정도 작게 만들어 주었더니 그 작은 입에 쏙쏙 넣으며 잘도 먹었다. 그 모습이 또 너무 예뻐 잠시 넋 놓고 바라본다. 그런데 1, 2개의 주먹밥을 남겨놓고는 갑작스레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너무도 느닷없어 이유도 모른 채로 그냥 따라 울고 싶어 진다.

“세원- 어떻게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어디 아파? 불편해?”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아이가 잘 쓰는 표현이다). 그냥.”

“그래. 알았어. 그만 울자. 엄마도 맘이 안 좋아.”

그러고는 신발을 신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같이 어린이집 차량을 기다렸다. 차가 도착해 올라타려는데 또 갑자기, 이번에는 크게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오늘 기분이 별로야? 울지 말아~”

그러곤 감정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차량은 떠났다. 잠시 후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더니 조금 더 울다가 손에 든 사과한쪽을 먹고 괜찮아졌다고 했다. 그날 오후 하원길이 기분 좋은 세원이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살짝 꺼내보았다.

“세원아 아침에 주먹밥 다 먹고 갑자기 왜 눈물이 났어?”

“응~ 좋아서~ 엄마가 좋아서 눈물이 났어~”

그러면서 신이 난 발걸음으로 뛰듯 걷는다.           


갓 난 아이는 배가 고파서, 졸려서, 아파서, 기저귀가 축축해서, 안아달라고 등등 그 시절엔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난데없이 울어서 아이를 보내놓고도 마음이 좋질 않아 왜 울었을까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속 여자주인공이 회전의자에 무릎을 접어 앉고서 하는 이야기를 잠깐 적어본다.           


"가끔은 길을 걸을 때 보도 위로 한 줄기 햇살이 떨어지면 그냥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가고 어른이니까 순간적인 감상에 빠져서 울면 안 된다고 마음먹어요. 내 생각에 토니도 가끔 그랬던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되는지 영문도 모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요. 살아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태..."


아마도 그날 아침 세원이는 스스로도 까닭 없이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어느 누구보다도 하루하루를 진심을 다해 생생하게 살아가는 작고 어린아이는 살아있으니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그런 상태가 분명 아주 아주 많을 것이다.          


'슬프다.' 나는 지금 슬픈가? 이 슬픔이라는 독특한 감정은 무엇일까? 제대로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화가 나거나 분노를 느낄 때에 끝에 이르러서는 슬픔이 된다. 나는 어릴 적부터 화가 나면 동시에 슬픔이 찾아와 제대로 화내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던 아이였었다. 그냥 표현력이 서툴고 눈물이 많았던 아이였을지도 모르겠다. 철없던 시절 엄마와 다퉈 무기력할 때, 공부를 해도 해도 오를 생각이 없는 성적 앞에, 사랑했던 사람으로 인해 아파할 때, 다니던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사건에 휩싸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을 때, 나는 어떤 종류의 약자였다. 아마도 그 상황을 나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런 약자가 되는 경험에 놓이는 것이 슬픔이지 않을까.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 보도 위로 떨어진 한 줄기 햇살,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 비 내리는 추운 겨울날 껍질이 듬성듬성 벗겨진 젖은 나무, 깊은 숲 속에 나뭇잎을 거의 다 떨구어 낸 키 큰 나무들의 우듬지들이 자아내는 가느다란 풍경, 멀리서 작은 아이가 엄마를 향해 열심히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 그날 아침 세원이의 눈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이 나의 눈으로 옮겨와 달린다. 삶은 유한하니까.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슬픈 감정을 느끼는 건 아마도 숨은 영원하지 않고 금세 사라져 버릴 것이란 것을, 어른보다도 작디작은 아이가 훨씬 더 본능적으로 느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소중하고 귀하지만 모든 유한한 순간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세상의 일과 자연 앞에서는 작고 약한 존재임을 누군가에게 슬픔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하여 모퉁이부터 천천히 맞춰 나아간다. 끝내 완성시킨 퍼즐 작품을 마음속에 걸어두고 가만히 또 가만히 바라본다. 슬픔을 바라본다. 그러다 아이처럼 울고 싶은 만큼 목놓아 엉엉 울진 않지만 작게 소리 내어 운다. 슬픔이 정화력을 가진다. 새해가 되었지만 12월까지 정리하지 못한 여러 일들을 고스란히 안고서 조용히 1월을 맞이했다. 다시 살아나갈 힘을 얻어보려 부단히 애쓰는 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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