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우는 자식은 가장 효자가 아니라, 가장 못 사는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삶에 대한 울분을 터뜨릴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나의 형제들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뒤에 슬픔이 아니라 각자의 울분을 토해 냈다. 서로 자기 입장만을 내세우며 이해받길 원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몰랐다. 결말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것으로 끝났다. 모두가 각자의 사연으로 한이 많은 인생들이다.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 찾아왔을 때 가족은 힘을 모아 위기를 돌파하지만,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가족은 해체된다. 결론이 뻔한 싸움을 왜 그렇게 길게 끌며 힘들어했는지, 왜 그렇게 자신만 이해받길 원했는지 지나고 보니, 참으로 허무한 시간을 보냈다.
나 그동안은 아들에게 형제 하나도 만들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은 지우기로 했다. 형제라고 혈육이라고 마냥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사이는 아니었다. 때로는 이해와 지지가 없는 혈육보다, 공감과 존중을 할 줄 아는 타인에게서 더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하니까 말이다.
개학이 계속 미뤄지다가 등교가 시작됐지만 팬데믹 상황은 여전했다. 길어진 방학에 늦잠이 습관이 되어 버린 탓인지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고3이 되자 아이는 학업 부담까지 느꼈는지, 점점 더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나 그 시점에서 세상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아이에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공부 안 해도 되니까 학교만 다녀.엄마가 미안해. 좋은 고등학교 보내 줄 능력도 안 되고, 홈스쿨링 해줄 능력도 안 돼서.”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그게 엄마 탓인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탓이지.”
하더니, 그때부터 맘 편히 학교만 다니며 대놓고 공부를 손에서 놓았다.
한바탕 형제들과 감정을 소모하고, 아이와 씨름하고, 얄팍한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면서 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
그런 가운데 소설을 썼다. 이번엔 문화재단에서 출판 지원을 받은 탓에 연말까지 무조건 책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소설집을 내었는데, 모두 삶과 죽음에 관한 우울한 이야기들이었다. 쓸 때는 심혈을 기울인다고 했지만, 결과물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홍보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작가 멤버 중에서 소설로는 신인 작가지만, 오랜 경력의 지상파 방송국 드라마 피디 분이 계셨다. 그분이 나의 소설을 읽고, 또 나의 과거 이력을 알고 드라마 집필 제안을 해 주셨다.
일본 만화를 드라마로 각색하는 일이었다. 드라마를 쓴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처음엔 두려워서 망설였는데 원작을 읽어보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윤곽이 그려졌다.
피디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선의와 함께 이 글이 나와 결이 맞다는 것도 파악하고 계신 듯했다.
원작에 대한 나의 해석과 드라마 각색 방향을 피디님과 토의하며 비로소 활력을 되찾았다. 13년 만에 쓰는 드라마 극본이었는데, 글이 써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글이 마구 써지는 건 아니었고, 시놉시스를 구성할 때 팔과 다리가 뜯겨 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매일 찜질방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캐릭터와 작품 방향을 만들어 나갔다. 한 달 넘게 끙끙 앓다가 사흘 밤을 세워한 회분 원고를 완성했다.
피디님도 어느 정도 글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대로 계속 진행해 보라고 하신다.
그런데 피디님이 99% 장담했던 드라마 진행이 예상대로 진척되지 못하고 몇 달이 흐르고 있었다. 여러 드라마를 연출했던 피디님은 나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며 일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경험밖에 없는 나는 이 일에 대해 슬슬 포기하고 있었다. 두 달이 지나 피디님은 드라마 실패 소식을 전하러 일부러 춘천에 왔다.
피디님은 소식을 전하며 나에게 무척 미안해했지만, 난 이미 예감하고 있었기에 순순히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회 원고에 대한 소정의 원고료만 받으며 일을 일단락 지었다. 쏟아부었던 열정에 비해 포기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안 될 것 같으면 기다리게 하지나 말라고 원망을 퍼붓고도 싶었지만, 그의 의도가 애초에 선의였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실패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일상 회복이란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고, 작가들의 모임도 재개되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모임은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기성작가들은 과거의 영광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기 일쑤이고, 신인 작가들은 책이 안 팔리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여자 작가들은 남편의 월급이 있으니, 고급 취미 생활을 하는 정도로 여겨졌고, 남자 작가들은 가난한 것에 길들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책을 안 읽는 요즘 세태를 비판했다.
꼬박꼬박 먹어야 살 수 있는 밥을 파는 식당도 망해나가는 곳이 태반인데, 굳이 안 읽어도 되는 책을 그렇게 재미없게 써놓고 책을 안 읽는 요즘 사람들을 탓한다는 게 우스웠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자신의 글이 칭찬받기를 원했으며, 서로를 추켜세우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봉산탈춤에서 양반들이 파자 놀이 하는 장면이 떠 올랐다.(엉터리 한시를 지으면서 서로 명작이라고 추켜세우며 감탄하는 무식한 양반을 풍자한 장면이다)
그러다가 모임은 지자체가 운영하는 문학관을 지키기 위해 정치색을 발휘했다가, 그것도 뜻대로 안 되니, 슬그머니 휴지기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린다. 모임이 만들어질 땐 신문에 기사까지 났다가, 처음 열린 이사회가 휴지기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회의를 하면서 회비로 식사비를 결제하는 상황을 나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가 제대로 찍혀버렸다. 2년 동안 참여했던 백일장 심사위원에서 제외되었고, 그 자리는 말 잘듣는 누군가로 채워졌다.
한 10년 동안 학생들과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정의'에 대해 토론만하며 지내다 보니, 이 나이쯤 됐으면 지녀야 하는 세상사에 대한 눈치가 내겐 없었나 보다.
적당히 눈 감고, 적당히 줄 서고, 그렇게 윗선이 하는 일에 비위를 맞추다가 떡고물이라도 건져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걸 난 이제야
비로소 현장 실습한 셈이다. 현장 실습은 마쳤지만, 그래도 난 그렇게 살지 못 할거다.
책 판매 부수 저조, 드라마 실패, 형제간의 다툼, 인간 세상에 대한 환멸, 경제난까지.
이렇게 상처 5종 세트를 떠안고, 이제 너무 지긋지긋한 춘천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