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책이 아니었다. 좁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이런 것들은 다 처분해야 했다. 책과 책장 두 개, 아들의 침대까지 당근 마켓에 나눔으로 올리니 물건들은 5분도 안 되어 물건을 자신에게 달라고 아양 섞은 말투의 쳇이 대여섯 개씩 올라왔다. 제일 먼저 쳇을 보낸 이에게 물건을 주기로 했다. 그것을 가져가는 이들은 그것을 놓을 공간이 있을 테지? 씁쓸했다. 그렇게 많이 이사를 다니면서 잘 치지도 않는 피아노는 여태 왜 끌고 다녔을까. 일찍 처분했더라면 얼마 간의 값이라도 받았을 텐데. 후회하기엔 늦었다. 지금이라도 다 버리면 된다. 아니 버릴 수밖에 없었다.
8월 말이다. 벽걸이 에어컨도 옮기려면 별도의 설치비가 든다. 조금만 참으면 여름은 끝날테니까.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오는 사람에게 혹시 에어컨이 없으면 내 에어컨을 두고 갈 테니, 20만 원에 거래하자고 했더니, 그는 바로 내 통장에 돈을 입금했다. 그야말로 쿨거래였다. 그의 입장에선 따로 설치비를 들이지 않아도 되니, 그에겐 남는 거래이고, 나에겐 편리한 거래였다.
대신에 낡은 옷가지와 이불, 냄비와 바가지, 그릇을 챙겼다. 꼭 필요한 냉장고와 세탁기는 때마침 고장이 났다. 이삿짐은 더 간편해졌다.
방 하나에 주방 겸 거실, 작은 욕실. 5평 정도의 텃밭을 끼고, 주인집이 마주하고 있는 시골에 11평짜리 공간이었다. 주인집에는 70대 부부가 살고 있고, 이전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내 경제력이 이 집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나 얼마 전에 보았던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구 씨처럼 잠시 은둔 생활을 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하지만 이 집은 구 씨의 집보다 더 옹색했다.
침대를 하나 놓으니, 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삿짐센터 사람들은 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짐을 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만 했다.
20년 동안 수많은 이사를 해 봤다. 나의 이사는 늘 5톤 트럭 하나의 포장이사였고, 80만 원 정도를 지불했고, 반나절이면 이사가 끝났었다. 그런데 4년 만에 하는 지금의 이사는 1톤 트럭 두 대도 꽉 차지 않은 짐으로 90만 원을 지불했다. 그동안 임금이 많이 오른 탓이라고 한다. 이사 비용을 아끼려다가 일 못하는 이삿짐센터를 만나서 하루 종일 진을 뺀다. 공간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이삿짐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그들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후 네 시가 되어 내가 먼저 지쳐서 그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자리를 찾지 못한 짐들이 거실 바닥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더 버려야 했나. 한숨만 나온다.
가까운 곳에 편의점도 찾지 못해, 수돗물을 끓여 계속 믹스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주시는 밥 한 공기와 사골국을 받아 몇 술 먹다가, 짐들을 그대로 둔 채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닭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남은 사골국과 밥을 마저 먹고는 짐을 하나씩 정리했다. 도저히 자리를 찾지 못할 것 같은 짐들을 두 개의 앵글 선반에 하나씩 정리했다. 아들의 앨범이나 책이 담긴 박스는 뜯지 않은 채 앵글에 넣고, 그 앞에 창문에 달았던 버티컬을 쳐 버리니, 어느 정도 깔끔해졌다.
화장실은 옆 공간에 패널로 덧붙여져 있었다. 변기에 앉으면 공간이 좁아서 다리가 불편했지만, 옆 공간은 많이 남아서 창고에 넣어 둘 법한 물건을 넣어 두었다.
아무튼 살아보겠다고 낡은 싱크대에 시트지를 붙이고, 화장실과 현관에 페인트를 칠했다.
시골집을 얻었다고 하니, 친구들은 전원주택을 상상하는지 신기해하며 놀러 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 차마 이 집을 선택한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고 말하지 못했고, 초대할 수도 없었다.
년 세를 치르고 나니, 아껴 쓰면 석 달 정도 버틸 만큼의 돈만 남아 있었다.
대학 1학년인 아들은 2학기를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방 대학에 다니는 아들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제대 후 재수를 하겠다고 한다. 난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 이 작은 집에 혼자 살며 아들이 제대하기 전에 새로운 기반을 만들어야 했다.
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니, 가을이 되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통장의 잔고가 어떻든지 간에 나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시골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일어나면 이어폰을 끼고 시골길을 산책했다. 오늘은 이 길로 다음 날은 다른 길로 행선지를 정하며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수많은 유배 문학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유배 문학의 화자는 대부분 ‘나 돌아가고 싶어!’를 외쳤지만, 난 항상 삶에 치이는 상황 속에서 유배지에서의 삶을 동경하고 있었기에 이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아침을 먹고 원고를 펴 들었다. 아이가 입대하고 나면 문학 창작촌에 지원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사이사이 일자리도 검색해 보았다. 지금까지 했던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학생들 가르치는 일은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과한 책임감이 따라왔다. 그만하고 싶었다.
책임감이 따르지 않는 단순노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루베리 농장에 가게 되었다. 잘 익은 블루베리를 선별해서 따기만 하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하자니 어느 정도가 익은 것인지 구분하는데 확신이 없었다. 아무리 단순노동이라고 해도 약간의 판단력은 필요한 것이었다. 일하러 모인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젊었지만, 행동은 가장 굶 떴다. 블루베리를 따면서 수시로 시간을 확인했다. 노동요가 왜 존재하는지를 체감하는 순간이다. 다른 이들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막내가 음악 좀 틀어보라고 한다. 하지만 휴대폰 배터리가 없었다. 와이파이 지역을 벗어난 휴대폰은 배터리가 순식간에 소모되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하루를 채우고 일당 10만 원을 받아 들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팔다리가 욱신거려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든데, 신기할 만큼 머리가 가벼웠다. ‘고통의 전이’란 말인가. 팔다리의 통증보다 머리가 가벼워진데 정신이 쏠려 기분이 상쾌했다. 종종 농사일에 나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몸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더니, 사흘이 지나서야 원래의 컨디션을 찾을 수 있었다. 노동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었다.
아들의 종강 날이 되었다. 자취방을 정리하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가 보름이 지나면 입대할 날짜였다. 난 아들의 입대보다 보름 동안 그 좁은 집에 아들과 함께 있을 것이 더 걱정되었다. 짐 정리를 하기 위해 아들의 자취방에 갔다. 휴학계를 내려고 학교에 간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휴학계를 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엄마, 할 말 있어.”
“말해.”
“전화로 말하긴 그렇고 만나서 얘기해.”
아들의 목소리만으로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아마도 좋은 일?”
그럼 됐다. 학교에서 자취방까지는 10분도 안 걸리는데, 굳이 전화를 건 아이에게 싱겁다고 타박하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 나 상근예비역이래”
자취방으로 돌아온 아들은 말하며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그게 뭔데?”
현역이지만 훈련소에 다녀오면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고, 특정 사유가 있는 사람은 지원이 가능하지만, 나머지는 년 말에 티오만큼 내년 입대자를 대상으로 추첨하는데, 입대를 앞둔 이들에겐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제도라고 한다. 아마 시골에 청년이 별로 없어서 된 것 같다며, 시골집으로 이사한 엄마의 선견지명을 칭송한다. 좀 전까지 친구 앞에서 표정 관리하느라 힘들었다며 오두방정을 떨며 좋아하는데, 그냥 원래대로 입대하면 안 되겠냐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입대 날짜도 미뤄졌다. 좋아하는 아들과 달리 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급하게 방학 특강 광고를 올리며,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도돌이표가 네 번이나 반복되는 노래가 있을까. 아마 너무지루해서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유배도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나에겐 유배지에서와 같은 삶조차 과분한 꿈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