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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Oct 16. 2024

행복주택에 가면 행복해질까

그해 겨울은 가장 추웠고, 기름값은 매일 사상 초유를 경신했다. 기름보일러를 틀면 바닥은 따뜻했지만, 밤 기온이 영하 5도 이하인 날에는 집 안으로 스며드는 찬 기온이 심해서 히터를 틀어 놓아야만 잠을 잘 수 있었는데, 히터를 켜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결국엔 11평 좁은 집에서 년 세만큼의 난방비를 치르고서야 겨우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끝을 모르는 것 같았던 지난여름 폭염이 지나갔듯이, 그해 겨울도 끝은 있었고, 봄이 되었고 마당엔 꽃이 피기 시작했다.      



겨우내 문을 꽁꽁 닫고 살다가 창문을 열어 놓으니, 주인 내외와 마주하는 일도 많아졌다. 가족에게서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주인아주머니의 인자하고 다정한 모습에 끌려 이 집을 선택한 것도 있었다. 이사 올 때 식구처럼 편하게 잘 지내자는 주인아저씨의 말도 푸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점점 아저씨의 친절이 부담스럽다고 느껴질 무렵부터 아주머니는 나를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머리 아픈 일투성인데, 그런 상황에까지 신경써야 하는  내 처지가 한없이 처량했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에게 하소연했더니, 친구는 나보다 더 화를 냈다.


“늙은 남편 지나 좋겠지. 둘 다 재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것 같아서 시원했다.      

그들을 비난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얼마 전 컬투쇼를 알게 되었는데,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쳐다보는 할아버지에게 바가지 긁는 할머니의 에피소드가 재밌는 이야기 중 상위권을 차지한 것을 보고 난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는 그 상황조차 나에겐 스트레스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들은 아마 가장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사는 여자는 그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처를 받는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시골에서 조그만 텃밭을 일구며 살고 싶은데, 아마도 혼자선 무리일 것 같다.      





드디어 아들의 입대 날짜가 되었다. 입소식 날 다른 훈련병들은 일가족이 한 분대를 이룰 듯, 우르르 몰려왔다. 아들과 나 단 둘 뿐인 가족은 우리 밖에 없어 보였다.

입소식을 마치고 혼자서 돌아오는 길이 쓸쓸하다. 아들이 상근예비역이 된 건, 시골집이 아니라 홀어미 외아들이란 가족관계를 고려한 병무청의 선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훈련소 입소 후, 처음 2주간은 전화 통화도 안 되니,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그동안 고등학교 기숙사, 대학 1년 자취를 하면서 떨어져 지낸 시간도 많았지만, 주말마다 아이를 만났고 언제든 통화가 가능했었다. 그런데 통화마저 안 되니, 안 해도 될 걱정을 또 사서하고 있다. 게다가 아들이 훈련소에서 나와서 자대 배치를 받으면, 아들 출퇴근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할 계획이었다. 훈련소에서 3주 차가 지날 무렵부터 통화가 될 때면 아들에게 자대배치에 대해 물어보며 애를 태웠지만, 자대배치는 결국 훈련소에서 나와서야 결정되었다. 아들은 주민센터 예비군 중대에 배치되었다.    


  

신혼부부 우선 공급이라는 행복주택에 입주 신청을 해 놓았다.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입주가 승인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된다고 하더라도 입주까지는 반년이나 남아 있었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 집에서 반년을 머무를 수는 없었다. 주인집 분들과 마주치는 것도 껄끄러웠고, 무엇보다 아들의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지만 반년을 예상하고 머물 수 있는 집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들의 출근지 가까운 곳에 마침 세입자가 임대 기간을 다 못 채우고 내놓은 집이 있었다. 재건축이 확정된 아파트여서 월세가 싸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1년 계약을 하면서 1년 안에라도 만약 집을 비우라고 하면 이사비용 청구하지 않고 나가겠다는 ‘뭐 이런’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이사를 했다. 기존 세입자가 짐을 거의 뺀 상태여서 사흘 뒤 주말에 바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사 비용을 거하게 치른 지 1년도 안 된 터라, 잔 짐들은 차로 실어 날랐고, 트럭 한 대를 불러 20만 원을 주고 큰 짐을 옮겼다.    


  

오래된 나무에 둘러싸인 5층 아파트의 2층이었다. 집의 절반은 이미 빈집이어서 주차장도 한가했고 고요했다. 하찮은 갈등을 겪었던 후라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이 고요함마저 좋았다. 단지 안 놀이터와 농구장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삶의 흔적이 잔뜩 담긴 낡은 풍경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창문은 모두 삐그덕거려 여닫는데 힘을 써야 했고, 개미 약을 사다 붙이고, 밤낮 전자 모기향을 피워 놓아야 했지만, 집 앞에 편의점이 있고, 모든 배달 음식이 가능했다. 당연했던 것들이 시골살이 1년 만에 값진 것으로 다가온다.      



가을이 되어 행복주택 입주가 허락되었고, 입주까지 한 달여 시간이 남은 11월 어느 날, 보일러가 멈추었다. 그렇게 추운 날이 아니었는데, 낡은 건물답게 집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보일러의 부품이 모두 단종되었다며, 이 아파트는 보일러가 고장 나면 모두 이사 나간다고 말하며 와 보지도 않았다. 한 달을 어찌 보낼까.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보일러에 부착된 설명서와 인터넷을 찾아보며 부품 이것저것 만져 보다가, 한숨을 쉬며 포기하고 누웠다가 다시 보일러를 붙잡고 씨름하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고장 난 보일러라는데, 더 용기를 내어 부품을 뜯어보니 낡은 상태로 찌꺼기만 잔뜩 끼어 있었다. 되는대로 찌꺼기를 닦아내고, 부품을 다시 끼워 넣었더니 보일러가 작동되었다. 한숨 돌렸다. 하지만 언제 다시 멈출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게 한 달을 조마조마하며 보냈는데, 다행히 새 아파트 입주하는 날까지 무사히 다시 보일러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다섯 달 만에 다시 행복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동안 낡은 아파트에서 살면서도 비싼 월세를 주었고, 계약 만기가 되면 쫓겨나듯 이사를 하며 살았는데(논술 교습소를 운영할 때는 중심가에 살아야 했고, 그곳의 집값은 변동이 커서 집주인들은 수시로 집을 사거나 팔거나 했다), 이곳은 비록 18평짜리 작은 집이어도 새집이며 임대료도 싸고 무엇보다 성급히 쫓겨날 일은 없다. 굳이 새집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스르르 여닫히는 문과 겨울에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도 집이 차갑게 식어버리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이사를 하고 나서야 그동안의 고단함이 밀려와 한동안은 기운이 빠져 옴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소파와 아들 침대, 에어컨과 냉장고, 식탁과 화장대를 새집에 어울리는 것들로 한 달에 하나씩 장만했다.

그리고 나서야 난 브런치 작가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글을 쓸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아들은 병장이 되었고, 군복무 사이사이에 다가오는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이젠 행복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그저 근심거리가 하나씩 줄어드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행복’이란 단어를 너무 남발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많은 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방증인 것 같아서 난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슬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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