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은 같은 단지여도 살던 집보다 더 깨끗했다. 문제는 8층이라는 거였다. 저층에서는 들지 않던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었다. 뛰어내리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뛰어내릴까 봐 두려운 거다. 그러면 이 모든 고통은 끝날 거라는 생각이 종종 찾아왔다.
의식의 끈을 부여잡고 참아내며, 또 1년 입시를 치러냈다. 입시생이 가장 많은 해였고, 그만큼 역대 최고의 입시 결과를 냈다. 입시생들이 쭉 빠져나갔다. 하지만 입시 결과가 좋았으니, 학생들은 곧 채워질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발을 뺄 수 있는 타임은 지금이었다. 학생들이 가장 적을 때. 그 동안 수없이 그만 두고 싶었지만, 학부모들의 원망을 듣는 것도 두려웠다. 입시생 학부모들은 마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수술실 앞에서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하는 장면을연상케 했다.
그때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은 정작 나였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힘들 때 죽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러나 이 말에는 모순이 있다. 세상에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죽고 싶다는 말인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기 싫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아니, ‘이렇게 살고 싶진 않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난 그랬다. 괴롭지만 죽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을 뿐.
수중에는 1년 치 정도의 생활비밖에 없었지만, 나 정말 살고 싶어서 과감히 교습소 문을 닫기로 했다. 아이는 3학년이 되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짐을 줄이고, 아이의 학교 근처에 단독주택 2층에 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1년이라도 학교 가까운 곳으로 가서 등하교에 대한 스트레스라도 줄여주고 싶었다. 어차피 내린 선택이라면 1년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10년 동안 접어 두었던 소설 원고를 다시 펼쳐 들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도 생각만큼 소설이 진척되진 않았다.
1년이 지나 아이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고민했다. 아이와 나 모두 뺑뺑이 트라우마가 생겼다. 내가 벌이가 적으니, 사교육은커녕 고등학교부터 내야 하는 등록금(지금은 사라졌지만)마저 벅차게 느껴졌다. 시골에 모든 게 지원되고 기숙사도 있어 삼시 세끼가 다 해결되는 학교가 있어서 아이에게 말했더니, 아이도 좋다고 한다. 아마도 아이는 지쳐 있는 나를 배려해 그렇게 선택이었을 것이다. 월요일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금요일 오후에 아이를 데리러 간다.
금요일 오후에 학교에서 만난 아이는 나를 안고 뱅그르르 돈다. 이제 나보다 키가 커서 엄마를 가뿐히 들어 버린다.
아이들이 착해서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잘도 얘기했다. 주말을 집에서 함께 보내고 월요일에 아이는 다시 학교로 갔다.
그렇게 하니 주중에는 소설 쓰는데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정말 기적처럼 우연히 한 출판사의 편집장을 알게 되었다. 난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출판사에 투고하고 이런 절차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었다. 서로 뭘 하고 사는 사람인지 얘기하다가 그에게 원고를 보여 주게 되었고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드디어 책이 출판되었다. 주변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출판기념회를 성황리에 마쳤고, 지역 안에서는 소위 셀럽이 되었다.
지역 조합 신문 독서 클럽에서는 이달의 책으로 선정했다며, 작가님이 함께 해주시면 더 뜻깊은 자리가 될 것 같다며 초대해 주셨다. 모두가 열심히 책을 읽으셨는지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자리였다. 그날의 독서토론은 아직도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이다.
유명한 소설가께서 우연히 지역 신문에 실린 나의 기사를 보고, 책을 사 보셨다며, 출판사로 직접 전화해서 나를 찾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인 작가가 책을 내면 나름 저명한 작가님들께 책을 보내며 한 마디라도 좋은 평을 해주십사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문학계의 관행 같은 것이었다. 그분이 직접 책을 사 보시고 내게 연락을 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분을 통해 그분의 제자를 비롯한 지역의 소설가와 시인들을 알게 되고, 모임도 만들어졌다. 혼자서 외롭게 글을 쓰다가 문우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는 가슴이 벅찼다.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소설가를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반가워하며 손을 덥석 잡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혼자서 글을 쓰는 게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같이 서로의 작품을 읽고 토론하고 그러한 시간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바로 코로나19로 인해 거리 두기가 심해졌다.
조용히 다음 작품을 잘 준비하려 했는데, 우울감이 심하게 찾아왔다. 학교 개학도 계속 미뤄지니, 아들도 짜증이 늘었다. 우울증 환자가 늘고 있다는 뉴스 기사가 연일 보도됐다. 지금은 나만 우울한 게 아니구나.
늘 세상에 뒤처지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하니 조금 위로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억지로 나를 위로한다고 한들 의욕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는 중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여든이 훨씬 넘은 엄마의 죽음이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질적인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잠시라도 엄마에게 마음으로라도 기대어 본 적이 없으니, 엄마는 나에게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오히려 수시로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 번거로운 존재. 어린이날 해준 것도 없으면서 어버이날은 왜 선물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는지 얄미운 존재였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허리에 금이 간 엄마는 몇 달이 지나도 허리가 회복되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 계속 누워서 일어나 앉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로 일어나 걸어서 집에 갈 거라고 믿고 있었다. 엄마 자신에게도 그다지 즐거운 인생도 아닐 텐데, 삶에 집착하는 엄마의 모습이 이상했다.
내가 병원에 갔을 때, 엄마는 잠을 잘못 잔다고 했다. 그러면 수면제를 처방해 달라고 의사에게 말하겠다고 하니, 엄마는 그거 몸에 안 좋다고 한다. 그 몸에 안 좋은 게 없이 한잠도 못 자는 딸을 옆에 두고 여든 넘은 엄마가 하는 말이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