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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Oct 07. 2024

질기고 더러운 핏줄

그때 끊었어야했다

현명한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적절한 도움을 요청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난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모른다.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기억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빠였다.

앞서 친구에게도 함께 가 달라고 먼저 말한 적은 없었다. 친구가 상황을 알고 자청해서 그 고생을 함께 해주었다.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아마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다.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함께 문제해결에 나서주거나 위로를 해주거나.


이제 어찌어찌 문제는 다 해결했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건 위로였다.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동안 내 마음은 몇 번이나 부서졌는데, 이 상황을 다 전해 들으면서도 그동안 나의 엄마, 언니, 오빠는 괜찮냐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즈음 큰 조카가 명문대에 합격해서 오히려 집 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면서 ‘이사를 어디로 갈까, 차를 무엇으로 바꿀까.’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눈물이라도 보이면 나는 경사에 초를 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친한 언니와 맥주를 마시다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언니는 참지 말고 펑펑 울라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 언니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잠시 위로가 됐지만, 그게 내 언니가 아니라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혼 후에 춘천으로 와서 오빠와 언니, 나는 걸어서 십 분 거리에 모여 살았다. 출근해야 하는 언니를 대신해 조카들의 유치원 행사나 초등학교 입학식에 내가 대신 갔다. 엄마가 아프실 땐 오빠가 병원비를 냈고, 나는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어떤 형제들은 부모님 병원비를 N분의 1로 정확히 나누어낸다던데, 나의 오빠와 언니는 나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돈을 내놓지 못하는 대신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병원을 모시고 가는 일, 쉽게 말해 몸으로 때우는 거였다. 첫째가 돈이 없어서 부모님 병원비 N분의 1 하자고 한다면 얼마나 모양 빠지는 일이겠는가. 내가 막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10여 년 반복되다 보니 나는 이 집에서 그냥 믿고 쓰는 도우미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나 보다. 누구도 내 슬픔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도 남인 사람, 그들에겐 더 남과 같았겠지만, 형부의 장례식 때 6살 짜리 조카를 장지에서 내내 업고 다닌 사람이었다. 지금 명문대생이 된 그 조카를.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걸 잊을 수 있는지 나는 도저히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그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더 서러웠다. 바로 그때 그들과 인연을 끊었어야 했다. 이혼은 주도면밀하게 잘만 해 놓고, 도대체 핏줄이 뭐길래 난 그 후로도 그들에게 휘둘려야 했을까.      



<서른아홉 살, 자야>에서 미혼모가 될 위기에 처해 있는 자야를 보고, 그녀의 아버지는 자야의 건강과 마음을 걱정하기보다 다른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더 걱정한다. 그런 아픔을 겪은 자야는 서른아홉이 되어서야 가족들에게 가족의 안위보다 다른 사람 눈이 더 중요하냐고 악을 쓰며 말한다.      



이 장면은 나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쓴 부분이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나의 언니는 내가 소설책을 내자, 책을 사서 지인들에게 돌리며 동생이 소설가가 됐다고 자랑하다가, 책이 잘 팔리지 않고 내가 어려워지자 다시 나를 외면했다. 그녀에게 가족은 자랑거리여야 했나 보다. 그녀도 내 책을 읽었는데, 그렇게 공들여 쓴 부분의 의미를 생각도 안 해봤나 보다.           





왼쪽 어깨가 점점 뻣뻣해지더니, 팔을 위로 들려고 하면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왼쪽 팔은 어느 방향으로나 45도 이상 펴지지가 않았다. 병원에 갔더니 복잡한 병명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오십견이란다. 내 나이 아직 40대 초반이었다. 오십견이라니. 이어서 허리 디스크가 찾아왔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날 때마다 허리에 통증이 있어 ‘아야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엉거주춤 그렇게 겨우 일어나는데 한 10초의 시간이 지나갔다. 마음이 급해 허리를 다 펴지 못한 채 걷는다. 그렇게 한 다섯 보를 떼고 나서야 허리가 다 펴졌다.

우리 가족력이 뼈가 약하다는 것이다. 모든 병은 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유전적으로 약한 곳을 치고 들어온다. 핏줄이란 참으로 더러운 것이었다.      



몸에 통증이 항상 따라다니니 신경이 더 예민해지고 수업하는 게 점점 더 버거웠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쉴 수 없는 형편에 쉬고 싶은 명분을 찾는 짧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돌봐줄 수 없는 사람이 병에 걸린다는 건 더 끔찍한 일일 뿐이다.

당시 TV에서는 배드파마가 큰 이슈가 되고 있었다.

양육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법적 권리이거늘 그걸 받으면서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모자라게 양심적이었던 나를 뒤늦게 자책해 봐야 소용없다. 이제 양육비를 청구할 데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중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2년 계약 후, 재계약을 하고 계약 만료까지 6개월을 앞둔 시점이었다.

집주인은 집을 팔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단지 안에 새집을 구해주고, 이사 청소와 이사비용까지 모두 해줄 테니, 이사만 하라고 내게 청했다. 6개월 동안의 월세 차액까지 지불하겠다고 한다. 그 사이에 월세는 더 올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약을 어기는 게 미안했는지,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과 이혼 결심, 그리고 미국행을 택했다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얘기까지 모두 하며 미안해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얼굴 붉히며 버텨봤자, 불편한 시간을 보낼 게 뻔하다. 어차피 6개월 후에 하게 될 이사비용을 아낀다고 생각하는 게 나았다.    


  

집주인은 당시 춘천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영어 학원을 했고, 나는 그 맞은편 낡은 아파트에서 월세 살면서 논술 학원을 하고 있다. 서로 겹치는 학생이 있었기에 대략 돌아가는 형편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내가 수업으로 버는 수익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월세를 받고 나는 월세를 낸다. 그가 이 집을 사서 월세를 받다가 집값으로도 수익을 냈다는 게 이런 순간에 왜 본능적으로 계산이 되는지 모르겠다.

집값의 차액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사비용, 내겐 너무나 큰돈인 이사비용을 받고 쫓겨나듯 이사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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