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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asson Oct 31. 2023

L에게 쓰는 편지

#07 누군가 네게 "좋아하는 것"을 물어본다면

2023. 10월

리나에게,





안녕 리나야.

 

넷플릭스에 나와 네 아빠가 재밌게 봤던 연애 프로그램이 있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서 데이트를 하는 내용이었어.

쇼의 초반부에 제작진이 각 참가자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더라.  

그 사람들은 막힘없이 술술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고.

답변에 거창할 건 없었어. 정말 소박하고 자잘한 일상의 순간들이나 특정 물건들을 열거하더라고.

물론 미리 대본에 적힌 질문을 읽어봤고,

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뒀을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막힘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더라고.


내가 만약 "좋아하는 게 무엇이에요?"라고 질문받는다면,

나는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런 걸 생각하며 살 여유가 있었나?

다행히도 나는 바쁘고 치열하게 사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더라고.


나는 아직 34년 정도밖에 안 살아봤지만,

인생을 살다 보니 '나'라는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오더라.

10대 질풍노도의 시기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20살이 넘어서도 30살이 넘어서도 꾸준히 고민해 왔어.

이런 고민도 사실 그럴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지라,

네가 태어난 뒤로는 이런 고민을 해볼 시간이 어디 있었겠냐만은.

그래도 요즘 내 생활에 여유가 조금 생겨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참 많더라고.


비 오는 날,

비 오는 날의 물비린내

잔디 깎은 날,

허리 잘린 잔디에서 진동하는 풀냄새와 비냄새가 섞인 짙은 녹색향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의 새하얀 적막감과 포근함

눈 오는 날 밤, 혼자 걸으며 상념에 잠기는 순간

물을 듬북 머금은 울창한 숲,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음악감상

비현실적인 컬러의 석양
아기의 작은 손과 발

초가을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며

건조하게 바삭거리는 이불을 덮고 자는 낮잠

아무 계획이 없는 저녁과 독서

햇살 좋은 날, 테라스에 앉아서 마시는 커피나 샴페인

여행 중, 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커피

고요한 새벽에 듣는 lofi음악

초여름밤 냄새

겨울 공기 냄새

등등

등등


네 아빠와 나, 둘밖에 없었던 스톡홀름 근교의 눈 덮인 숲
네 아빠와 늘 함께 걸었던 집 근처 산책길
겨울의 스웨덴, 낮 3시의 일몰 색깔
겨울 아침 일어나면, 거실 창밖으로 보이던 짙은 일출
몰타 집 근처에서 보는 석양
아이슬란드 여행, 네 아빠랑 나 둘밖에 없는 느낌이었어
회색, 안개, 촉촉하고 신선한 공기, 자연의 웅장함
흐릿하지만 물기를 잔뜩 머금어 선명한 자연
라스베이거스 출장 갔을 때, Zion 국립공원에 잠깐 들렀는데 그때 숙소에서 찍은 아침 풍경
싱가포르의 살짝 흐린 날씨와 물기를 잔뜩 먹은 초록색
햇살 좋던 날, 아빠랑 데이트했던 스톡홀름의 노천카페
제주도, 살짝 흐린 날씨와 가볍게 지나간 소나기, 그리고 그 뒤 사려니 숲길의 컬러
네 할머니 할아버지 연종삼촌과 함께 갔던 일본 시골여행, 쓸쓸하지만 우리밖에 없어서 좋았던 풍경
태국 코창섬에서 맥주와 함께 한 일몰
네 할머니와 사이공강뷰와 함께 했던 모닝커피와 조식
하얀 눈 가득했던 홋카이도
새하얀 눈밖에 없던 절경
네 삼촌이 찍어준 발리에서의 컬러
나 한국집 창 밖으로 보이던 해 질 녘
한국 어딘가의 산사
가을의 설악산
제주도 목장


쓰다 보니 참 많더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질문했을 때,

대답할 구체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리나야,

나는 부잣집 딸은 아니지만,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하신 덕에 그럭저럭 적당 살았어.


네 할아버지가 늘 범사에 감사하며 살라고 하셔서

나는 늘 내 주위에 감사하고 살았어.


한남동 언덕에 자리 잡은 대저택이나 유엔빌리지는 아니어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에,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몇 번을 실패해도

잠시 쉴 곳이 되어줄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삶이 지칠 때, 잠시 피신할 수 있는 나만의 세계가 내 마음속 깊이 존재한다는 것에,

쌍꺼풀이 없는 게 콤플렉스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다는 것에,

웃을 때 한가닥씩 멋없게도 코털이 삐져나와있지만

그래도 맛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다는 것에,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했다는 것에,

그리고 내가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을 구했는지

너 같은 사랑스럽고 예쁜 요정이 내 딸이 되어준 것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고 있어.


물론 많은 좌절과 고난들도 있었지만 안 좋은 일들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더라.

나는 유연했거든.

안 되는 일이나 어려운 일에는 포기도 빨랐고 단념도 쉬웠어.

많은 도전과 실패도 있었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았어.

모든 일에는 뜻이 있고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답을 찾을 거거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야)


이 모든 건,

내가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직접 겪어보고, 해보고, 느껴보고, 맛보는 모든 것들이

너라는 사람의 자양분이 될 테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막힘없이 술술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크길 바라.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랬듯이,

나도 너에게 이런 삶을 주고 싶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정신적으로 더 풍요롭길 바라.

똑똑한 것도 좋겠지만,

그전에 밝고 긍정적이고 바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네 환한 미소 주위로 좋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이 너의 편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행여, 나나 네 아빠가 세상에 없어도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 좋은 친구들 말이야.

살면서 겪게 될 무수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네가 버틸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하여금 세상에 태어난 게 너무 고마웠어.

이런 아름답지만 동시에 추악하고 알 수 없는 요지경 세상 속에

생각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했어.


너를,

이 세상에 불러온 건 바로 나와 네 아빠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잘한 일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이제 우리의 임무 아닐까.


내가 그랬듯이 너도 그러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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