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거미, 악어 그리고 세균맨
2024.04.05
햇살 좋은 날
리나에게,
요 며칠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온 황사가 너무 심해서 밖에서 놀지 못했네.
그래서 그런지 잠을 잘 때에도 힘들어하더라.
원래 바로 잠이 드는데 몸부림치다 잠들더라고.
마치 잉여 에너지를 끝까지 태우다 잠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는 것처럼.
공기가 좋아지면 더 걷고 더 뛰고 더 놀다 들어오자.
너를 어린이집에서 픽업해서 유모차를 태워서 집까지 바로 간다면 20분 정도가 걸려.
하지만 너와 함께 걸어간다면 1시간 30분이 걸리지. 엄청난 차이지?
바다도 구경하고 바다에 떠 있는 보트들도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비둘기도 쫓아가야 되고
길바닥에 돌이랑 나뭇가지도 다 한 번씩 집어봐야 되고
네 단짝 도리스랑 같이 걸어가는 날이면
도리스랑 숨바꼭질도 해야 하고 땅바닥도 기어다녀야 하고
보이는 계단마다 다 한 번씩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고
막대기 하나 주워 와서는 서로 자기 것이라고 뺏고 울고 삐지기도 해야 하고
이렇게 열심히 걸어오면 집에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단다.
가자고, 가자고 해도 말 안 듣는 너에게 내가 자주 하던 거짓말이 있어.
'리나야, 아기돌이 길을 잃었대.
우리가 얼른 저기 가서 아빠돌 엄마돌을 찾아주자.'
'리나야, 악어 저기서 오고 있는데? 얼른 빨리 걸어가자 악어 오기 전에!'
더러운 걸 만지려고 할 때 내가 자주 하던 거짓말이 있어.
'리나야, 거미가 올지도 몰라. 아이도 무서워아이구 무서워! 얼른 내려놔!'
'리나야, 세균맨이 손에 붙으면 어떡해! 세균맨이 리나 아프게 할걸? 얼른 내려놔.'
이 글을 읽고 있을 현재의 네가 혹시 거미나 악어를 아직도 무서워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만약 네가 아직도 거미에 진저리를 친다면 그건 내 잘못일 확률이 참 크거든.
이 거짓말이 잘 먹혀서 내가 자주 사용하게 되네.
네가 치카를 안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
네 입속에 세균맨을 빨리 찾아내야 이가 안 아프다고 했어.
네가 옷을 안 입고 온 집안을 뛰어다닐 땐
얼른 옷 입지 않으면 거미가 와서 리나 앙! 하고 물지도 몰라,
또는 얼른 옷 입지 않으면 모기 와서 리나 앙! 문다?라고 거짓말 했어.
나는 참 나쁜 엄마다.
너한테 이런 허튼 거짓말이나 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협박을 해.
네 아빠가 내가 계속 그런 거짓말하면 너한테 거미에 대한 공포를 심어줄 수 있다고 자제하래.
자제할 것도 뭐도 없는 게 내가 이 거짓말을 사용한 지 한 달 정도 되어가는데
요즘 너는 나를 믿지 않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거미랑 악어에게 오히려 흥미를 갖기 시작한 거 같아.
뭐…. 겸사겸사 인제 그만둬야지.
생각해 보면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한테 이런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
수박씨를 먹으면 뱃속에서 수박이 자란다고.
그 말을 듣고 너무 무서워서 수박씨를 꼭 뱉었어.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한참 뒤에 깨달았지.
아이라는 존재는 참 다루기 힘든 유리 같아.
나는 앞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너희를 키우겠지.
나 때문인가? 내가 잘못한 건가? 내 탓인가?
수없이 질문하며 끊임없이 과거를 되짚어 보겠지.
리나야,
만약 네가 아직도 거미를 무서워한다면 미안해.
거미는 무서운 게 아니야. 오히려 이로운 존재란다.
독거미가 아닌 이상 무서워 할 필요 없어.
내가 다 미안하다!
앞으로 이런 건 줄일게.
사랑해 나의 예쁜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