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주의 ※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오펜하이머> 관람 후기입니다.
놀란 감독의 12번째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왔다. 이 영화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허튼 프로젝트에 투입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하하의 말과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상당한 정치적 압박과 고뇌, 그리고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살았을 것 같다.
로버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영화는 크게 3가지 사건을 오가며 진행 된다. 원자폭탄 실험 단계, 1954년 원자력협회에서의 오펜하이머 청문회, 그리고 1959년 오펜하이머의 정적 '루이스 스트로스'의 장관 청문회. <덩케르크>와 비슷한 교차 편집이긴 하지만 <덩케르크>는 하나의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면 <오펜하이머>는 정반합의 느낌으로 이야기를 이어 붙여간다. 오히려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과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가 후반부에 나오는걸로 봐서 <메멘토>에 가까울 수 있을까.
어떻게 여러 플롯을 이렇게 구조화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영화는 또 크게 Fission(핵분열) 파트와 Fussion(핵융합)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는 컬러로 표현되며 오펜하이머가 핵분열을 통해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되는 부분을, 후자는 흑백으로 핵융합을 통한 수소폭탄에 반대하는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사실 핵분열이니 핵융합이니 중성자니 잘 몰라 문송하지만, 원자폭탄은 우라늄이 분열하며 발생하는 에너지를 활용한다면 수소폭탄은 수소가 융합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한다.
핵분열의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는 추진력 있고, 누구보다 원자폭탄 개발에 진심이며, 비범하지 않고 평범하다 싶은 사람에게는 오만하며, 공산주의 여자친구가 있는 상황에서도 남편이 있는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한다. 그리곤 결국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며, 일본에 투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독일에도 떨어뜨렸어야 했다는 농담을 연설에서 하며 환각인지 모를 분열의 전조를 감지한다. 그 개발의 과정에서 대기 중 연쇄반응이 그치지 않아 세상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까봐 걱정을 하면서도 완전 0(zero)이 아닌 "near 0"라는 이론적 결론을 바탕으로 실험을 강행한다. 마지막에 나온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서 아인슈타인은 이미 전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연쇄반응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오펜하이머는 그 위험성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실제로 독이 든 사과를 먹기로 결정하였다.
핵융합의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는 핵의 억지력(너무 강력해서 상대의 행동을 억제하거나 저지하는 힘)을 더 이상 믿지 않았고, 군비경쟁을 초래할 수 있는 수소폭탄의 개발을 반대한다. 마치 담배피던 형들이 동생들 앞에서 "후, 너넨 이런거 피지마라..." 라는 느낌이라면 너무 가볍고.. 하지만 과학자의 소신이 통하는 시기는 아니었기에 오펜하이머는 매카시즘 시기의 희생양이며 복수심에 불타는 쫌생스런 스트로스의 제거대상이자 트루먼(나중에 알았는데 개리 올드만이었다ㄷㄷ)으로부터는 결정권도 없으면서 원자폭탄을 만들어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징징거리는 애"라는 불명예를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스스로의 모순과 과거 자신의 과오를 타인 앞에서 벌거 벗겨지며 세상의 비난과 잡음, 스스로 느꼈을 자괴감, 죄책감 등을 묵묵히 버텨간다. 그리고는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후일 상을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이 주인공인 자리에서 상을 받고 늙은 채로 지금은 적이 되어 버린 옛 동료와 미묘한 악수를 나누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연쇄적으로 만나고 만나는 과학자들을 외우느라(아까 저 사람이 이 사람인가? 어어.. 근데 조쉬하트넷이었네? 이러면서 봄) 정신이 없었고, 정말 길긴 하구나 싶은 러닝타임에 엉덩이가 저려왔지만. 배트맨 시리즈와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를 통해 팬심 충만해져 있다가 테넷때 아 완전 저세상으로 가셨나... 싶었던(아직 2회차 시도를 못한 테넷..) 놀란이 이제는 다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보여준 것 같아 반가웠다. 그리고 그 음향이나, 배우들의 열연(킬리언머피! 로버트다우니주니어!! 에밀리블런트!!!), 시각적으로 꽉 차는 장면들로 행복한 관람이었다.
★★★★☆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