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이 남긴 것.
로버트 알트만 감독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대화를 나눈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사람, 눈 맞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전부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만난 사람뿐만 아니라 우연히 읽은 댓글이나,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본 얼굴들까지 포함하면 이제 불가능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존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사는 데에도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대에 당연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주고받기를 하며 우리는 서로의 삶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지고 올진 누구도, 그 자신도 알 수 없다. 우리의 기억력과 인식의 한계는 어쩌면 축복이다. 모든 사람을 기억하고 모든 것의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필히 미치고 말 것이다. 알 수 없음은 때때로 인생의 동력이 된다.
<숏컷>은 해충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뉴스 앵커의 방송 장면과 함께 시작한다. 살충제를 발포하는 헬리콥터의 소음이 불안으로 다가올 때, 그 소음 사이사이에는 관계없어 보이는 이들의 일상이 삽입되어 있다. 영화는 살충제에 대한 의심과 공포로 눈초리를 돌리는 듯싶다가도 결국 도시를 뒤덮은 해충이나 살충제가 아닌 그것이 나린 작은 일상으로 수렴된다. 해충과 살충제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많은 무의미와 무의미가 부딪쳐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유의미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살충제를 뿌리면 수영장을 청소해야 하고, 생일이 되면 케이크를 사야 한다.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관계 너머에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화해가 있다. 죽음을 담은 사진과 죽음을 연기한 사진이 뒤바뀌고 또 제자리를 찾는다. 모든 관계와 연결은 무관하지 않아 보임에도 그 인과를 또렷이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3시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 내내 우리는 유의미한 연결과 무의미한 이유 사이를 그저 바라본다. 이 불분명한 관계는 운명이라 부르기에는 과분하고, 우연이라 부르기엔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연결과 베일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답은 아마도 하나뿐인 것 같다.
인생은 앎과 모름 사이를 오가며 작동된다. 제빵사가 케이시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피니건 부부에게 진실된 위로를 전할 수 있었다. 반면에 뒤바뀐 사진 속에서 익명의 죽음을 발견했을 때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끝까지 서로를 의심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 선택지는 이분법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넓게 펼쳐진 스펙트럼의 형태를 하고 있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과 모르면서 의심하는 것. 확신하는 불확신과 외상 없는 죽음. 묻거나 대답할 기회는 결코 고르게 주어지지 않고 어떤 진실은 그보다 더 큰 사실에 파묻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혹은 모르는지에 따라 서로의 인생에서 우리는 다른 접속사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래서, 그런데, 그럼에도. 그 접속사는 때때로 읽을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몇몇 죽음은 그 관계에 따라 허무하고 허위이며 부지하고 사건이자 일상이다. 묻지 못하고 대답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저 LA라는 대도시의 죽음은 반복될 뿐이다. 극단으로 가다 보면 결국 살충제에 죽어갈 수많은 벌레들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살충제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다시 한번 지진이라는 성역 없는 사건으로 끝맺음한다. 지진 당시 헬리콥터를 타고 있던 스토미는 이렇게 말한다. "... What a beautiful sight L.A. is" 하늘에서 본 L.A. 는 분명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심하게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어떤 흠집이 있고 어떤 천금이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인생은 결국 그런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삶을 살아보지 않으면 결국 인생이라는 짧은 단어로 축약될 수밖에 없는 것. 우리는 아름답다는 말 안에 녹아있는 수 만 가지의 의미를 깨닫는 것 말고는 인생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 아름다움을. 내내 제 3자의 입장으로 지켜보기만 했던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와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저 사람들이 내 인생에 찾아와 남기고 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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