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연 팬이 되었다. 신비롭고 청초한 비주얼과 흡인력 있는 반전 눈빛과는 다르게 작품을 고를 줄 모르는 빈약한 시각과 부족한 연기력으로 그 동안 빛을 못 봤던 배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눈이 가서 그가 나오는 작품을 두 어 편 보고 난 후엔 ‘앞으로 임지연 나오는 건 다시는 안 본다.’ 로 끝났더랬다. 그런데 이번엔 제대로 골랐던 걸? ‘더 글로리’를 처음 봤을 땐 그 배우의 얼굴을 못 알아봤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미처 동일인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그는 이번에 이미지 변신을 톡톡히 해낸 듯하다. ‘박연진’이라는 악마같은 배역에 임지연은 마치 영혼이라도 판 듯 했다. ( 신들린 연기력이었다.)
나의 임지연에 대한 기호는 대중의 기호와 맞아 떨어졌다. 그는 요즘 말 그대로 ‘잭팟’을 터뜨렸다. 오랜 기간 매너리즘과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던 그가 드디어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임지연이 아니다. 그가 맡았던 악역에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이다.
요즘 난리가 난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고 나니 이상한점이 하나 있었다. 유튜브와 여타 플랫폼에서 더 많은 조명을 받는 쪽이 ‘피해자인 문동은’이 아니라‘ 가해자들’ 쪽이라는 점이었다. 연진, 사라, 혜정, 재준, 명오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력이 미쳤다는 건 알겠지만. (그들 또한 자신의 악역에 영혼을 팔아넘겼다.) 김 히어라가 고교시절, 실제 일진이었다는 재미있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들은 죄의식 없는 싸이코패스와 혼연일체가 되어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들에 비해 혜교의 연기력은 묻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들이 배역의 악마성을 드러낼수록 정내미가 떨어져야 정상이건만(아무리 연기력에 대한 호감도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점점 더 열광하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대중이 그들에게 보내는 애정을 들여다보면 완벽한 연기를 해낸 배우들에 대한 찬사만은 아닌 것 같다. 대중은 그들이 맡은 연진, 사라, 혜정이라는 캐릭터 자체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 (재준이 명오 또한 은근 귀엽다.) 유튜브에서는 혜정의 속물스러움과 광기에 가까운 천박함에 대한 편집, 패러디 영상으로 도배가 되어 있고 연진이 자신의 편 안에서도 서슬 퍼렇게 서열정리 하는 모습을 집중 조명한다. ‘하나님’ 뒤에 숨어 갖은 못된 짓을 일삼는 사라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약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모습을, 심지어 드라마는 위트 있고 귀엽게까지 그려내고 있다. 이들의 패러디와 영상편집으로 넘쳐나는 인터넷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니, 이젠 악역의 대사와 디테일한 몸짓 하나까지 다 외우게 생길 지경이다.
작가가 그들을 의도치 않게 너무 매력적으로 표현했던 걸까? 약자에 대한 학대에 죄의식이 없는 그들 각자가 애석(?)하게도 너무나 뚜렷한 개성으로 무장하고 있다. 부인할 수 없이, 그리고 약간은 불편하게, 그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 사실은 매우 당혹스럽다.
한 10년 전쯤 됐을까,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특히 한국 여성들에서 인기몰이를 했었던 ‘가십걸’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핫했던 캐릭터는 시크하고 쿨했던 퀸(?) 세리나도 아니었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마침내 상류층 소녀사회의 한복판에서 인싸가 되는 데에 성공해 낸 제니도 아니었다. 여성 캐릭터 중 사람들에게(특히 한국) 가장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는 다름 아닌 ‘mean girl(못된 년)’ 블레어였다.
‘이 구역 미친년은 나야.’
극 중 블레어가 남긴 이 유명한 대사는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밈meme이 되어 널리 쓰이고 있다.
블레어는 미국의 ‘어퍼이스트 사이드’ 태생인, 금수저 캐릭터 중 한명으로 ‘더 글로리’의 연진처럼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늘 자기편에 뒀던 운 좋은 소녀이다. 극중 연진처럼 대놓고 사이코패스 짓을 하지는 않지만 눈에 거슬리는 인물을 괴롭히고, 친구들 사이에서 늘 서열정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데다, 신분의 우위를 이용하거나 때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을 굴복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더 글로리’는 그래도 연진에게 뚜렷한 악녀의 틀을 씌웠지만 ‘가십걸’의 블레어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설정하여 오히려 그녀의 개성과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은 함정이다. ‘가십걸’의 한국 매니아층은 블레어에게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인터넷의 블로그에서는 매일같이 블레어가 입은 옷과 가방, 신발이 어느 브랜드, 어느 시즌의 명품인지에 대한 글로 채워졌다. 가히, ‘블레어 신드롬’이었다.
한편 평범한 집안이 늘 핸디캡이었던,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했던 우리의 제니(개인적으로 사랑했던 캐릭터)는 도리어 한국의 많은 시청자에게 미움을 받았다. 제니의 성장기 도중 필연적으로 블레어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압도적인 시청자의 다수가 비슷한 권모술수(?)를 부리는 두 캐릭터를 두고 언제나 블레어의 편에 섰다. 지인 중 한명은 제니를 미워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내뱉고는 했다.
“없는 애가 올라가려고 발악하는 게 미워.”
그 친구의 멘트가 꽤나 인상적이었던지,(그리고 얼마나 슬펐던지) 최근 ‘더 글로리’ 열풍을 보면서 그 아이를 다시 떠 올리게 되었다. 그 친구의 멘트인 즉슨 “있는 애가 그 자리를 지키려고 발악하는 건 괜찮아.” 이렇게 바꿔 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발악이 아니라 오히려 약간은 귀여운 도발이자 투정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그것은 기지와 지혜이고 자신감이자 대담한 용기라고 치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 있는 자에게 끌리는 것 같다. 그 사람이 가진 부, 사회적 지위, 그 사람이 가진 값비싼 모든 명품을 그 사람 자체로 인식하는 경향, 대중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들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설령 그 모습이 ‘더 글로리’의 가해자들처럼 ‘극악’의 형태를 띠더라도 말이다.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가해자들이 어떤 식으로 벌 받을지에 대해 궁금해 마다하지 않지만, 아직까지 그들 마음속을 파고 든 가해자들의 미친 존재감은 극 중 동은이 품고 있는 감정만큼이나 크다. 그것이 분노인지 애증인지 시청자들은 분간하지 못한다. 아직 가해자들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은 시즌1만을 보고난 후 시청자들은 피해자이자 약자인 동은을 은연 중 ‘타자’의 존재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시즌 2에서 그 힘이 역전된다면 대중은 비로소 동은을 온전한 주체로써 인식할 것이다. 연진이 동은이 계획한 복수극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지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온전히 동은의 편에 서서 그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 순간부터 연진과 주변의 가해자들은 시청자들의 눈에 타자이자 대상이 되는 역전이 벌어질 것이다.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우리들’이라는 영화에서는 왕따 초등학생 선이와 이 사실을 처음엔 몰랐던 전학생 지아의 우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이가 특정 아이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 지아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고 가해자의 편에 서는 장면은 놀라웠다. 그러나 지아도 알고 보니 전학 오기 전의 학교에서 실은 똑같이 따돌림을 받았던 아이였다는 반전은 또 어떤가? 이 모든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로는 또 너무 현실적이라 가슴 한켠이 쓸쓸해 졌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세계가 순수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선이가 지아에 대한 공격수단으로써 따돌림을 받았던 지아의 과거를 들추는 방식으로 응수하는 장면은 더욱 슬프다.
피해자였던 선이와 지아는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창피해 했다. 그들은 약자였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했고 자신을 타자화시켰다. 나이 먹고 어른이 되었다고 달라질까? 아니,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근본 심리는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약자를 본능적으로 기피하고 대상화시킨다. 우리들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자신을 강자에게 대입시키고 싶어 한다.
‘더 글로리’의 악마 군단들이 해일과 같은 인기를 얻는 현상이 재미있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임지연이 매력 있었을 뿐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