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의 공포와 혐오가 낳은 비극적 연쇄
『프랑켄슈타인』— 아이가 괴물이 되기까지
영화 속 피조물은 '새로 갓 태어난 아기'에 가까웠다.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처럼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피조물을 영화에서는 원작과 다르게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그리고 있다.
피조물에게 세상의 전부는 단 한 사람 자신을 만든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데에만 몰두했지 이후의 일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것. 이게 마치 무책임하게 아이만 낳아 놓고 감당하지 하는 부모들을 연상케 했다.
원작에서는 피조물이 깨어나자마자 프랑켄슈타인이 겁에 질려 도망가는 걸로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처음에 자신의 아이처럼 돌보고 보살폈던 게 인상적이다. 그러나 나중엔 결국 학대와 살해 시도로 이어지는 장면은 너무나 끔찍했다.
부모가 아이를 미친듯이 때릴 때엔, 결코 그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그 아이가 잘 되라는 이타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니라는 걸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그건 그냥 아이가 미워서이다. 혹은 자신에 대한 미움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방식이거나.
만약 아동에 대한 인권이 지금처럼 강화되지 않았다면 19세기 이전처럼 유아살해율은 여전히 끔찍하게 높았을 것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맞고 또 맞으면서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갑자기 떠올랐던 건 과장이 아니다.
이 피조물이 결과적으로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 건 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원작에 없던 이 사건이자 스토리는 기예르모 델토르가 끼워넣은 영리한 장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아기같았던 이 피조물이 분노와 절망감에 쩌든 괴물로 재탄생하게 된 데에는 창조자에게 학대받고 버려진 과정의 첫 번째 트라우마. 이후 인간들과의 첫 대면에서 극단적 거부 경험으로 이어지는 두번째 트라우마, 숨어서 스스로 학습하고 키웠던 지능 때문에 오히려 더 커지게 되는 실존적 절망감, 이 세 단계가 있었다. 이 스텝을 차근차근 밟으면서 세상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와 악의로 가득찬 괴물로 재탄생을 하게 되었던 것. 괴물 같은 범죄자 중에는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보다는 대다수가 이런 루트를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행히 이 생명체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맹인인 한 노인으로 인해 마음의 치유와 정화를 경험하게 됟지만, 그리고 마지막 빅터의 고해와 사죄를 통해 모든 분노와 악의 굴레를 끊어내는데 성공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데 라지, 맹인이었던 이 노인이 했던 말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대사가 하나 있다.
“용서하고 잊는, 그게 진정한 지혜이다, 누구에게 당했는지도 알면서, 흘려보내기로 선택하는 것 말이야.”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련 영상은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