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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May 26. 2024

인격이 없는 점토 인형이 되어본 적 있나요?

 어릴적에 ‘사브리나’라는 미국 시트콤을 넋놓고 재밌게 본 적이 있었다. 현대판 마녀 가족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미국 틴에이저들의 로맨스와 자유분방함을 무척이나 동경했었던 나는 극 중 주인공인 여고생 사브리나의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들에 몰입했었던 것 같다.


  특이한 점은 사브리나가 말 그대로 ‘마녀’라서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점이었다. 학교 선배들 졸업파티에 초대받게 된 그녀가 마법으로 가짜 남자친구를 만들어 내었던 에피소드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능력으로 그녀는 자신과 미묘하게 썸만 타는 중이었던 바람둥이 킹카의 질투심을 유발시키는데에 성공한다.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형상을 만들고 그 안에 일시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의 마법, 그런식으로 필요한 누군가를 잠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편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격이 없는 밀가루 인간, 인격을 갖춘 사람을 필요에 의해 쓰다 버리는 건 사람이 할 짓이 당근 못 되지만, 밀가루 인간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리한가. 가까운 미래에 곧 이것이 로봇으로 실현되겠지만 말이다.      

 

 가끔 사브리나의 밀가루 인간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때 봤던 에피소드에서처럼 좋아하는 누군가를 질투하게 만들고 싶을 때, 혹은 혼자 밖에 있는 상황에서 너무 배가 고픈데 혼자 밥먹기는 싫을 때, 그 상황에서 하필이면 삼겹살까지 땡길 때, 한강 수영장가서 태닝도 하고 고프로로 영법자세도 서로 체크해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딱히 주변에 그정도로 수영에 미친 사람이 없을 때, 혹은 실내수영장만 좋아하고 야외수영장은 다들 부담스러워할 때? 등 등( 네 몸매 아무도 안볼텐데.. 쩝) 재미있게도 밀가루 반죽이 필요한 상황은 살면서 생각보다 많았고 그때마다 사브리나 시트콤이 생각나고는 했었다.      

 

 몇 달전에 느닷없이 지인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예전엔 친자매보다 가깝다고 느꼈지만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1년에 두 번 만나면 많이 만나는 친구가 된, 약간은 서글퍼진 관계.

 그 친구에게는 많이 섭섭했다. 하필 멀어지기 시작했던 시기가 내가 많이 아프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나서부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가족관계에도 굴곡이 있는데 친구사이는 안그렇겠어? 그 친구와는 그렇게 멀어지고 일종의 ‘Freinds with Benenfit’ 같은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친구가 해외 리조트에 가서 며칠 쉬었다 오고 싶다며 동행상대로 나를 희망한 것은 의외였다.  아직 주머니사정이 별로였던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에어텔 비용의 전부를 자신이 댈테니 현지에서 쓰는 여행비만 내가 부담하면 된다는 말로 나를 현혹시켰다. ‘현혹’이었지만 부담스러운 마음도 당연히 있었고 의도가 석연치 않아 처음엔 거절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친구는 내가 궁금해 하는 의도를 아주 쿨하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가서 아무것도 안하고 쉬고만 싶은데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고 맞춰주는 사람이 없을거란 얘기였다. 오랜 친구이자 이미 편한 사이가 된 나와 동행한다면 서로 각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충분히 쉬다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뒹굴고만 싶은 자신은 수영장 썬베드에서 뒹굴기만 하고 수영 좋아하는 나는 수영하면 되지 않겠냐는 그 제안, 너무 솔깃하지 않은가 말이다. 난 그 친구와 짧은 해외리조트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예전 그 친구가 어려웠을 때엔 거꾸로 내가 여행의 전비용을 다 감당한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덜 미안해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결국엔 동의.     

 

 그러나 그게 결정적으로 둘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친구에겐 그것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역학관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았다. 쉬러 가는 여행은 쉬는 게 아니었고, 여행에 조금의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걸 그 친구 기준과 입장에 맞춰줘야 하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걸 확실히 인지했을 땐, 그 땐 이미 여행지에 도착하고 나서 여행을 본격적으로 즐겨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어쩌겠어. 좋게 있다 오려면 그러려니 해야지. 거기까진 그냥 받아줄 수 있었지만, 집에 돌아올 무렵엔 그녀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마저 잃은 태도를 숨기지 못하고 결국엔 내 앞에서 드러내었다.

 

 밀가루 반죽이 필요했었던 그녀, 돈을 주고 너무 비싼 밀가루 반죽을 산 데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여행 막판에 치밀어 올랐던 건가. 그녀는 풍자씨를 모르는 나에게 “넌 도대체.. 한국사람이 맞니?” 하면서 하던 말을 뚝 끊었고, 내가 개그맨이냐고 묻자 세상 귀찮다는 듯 눈도 마주치치 않은 채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예능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냐며 쏘아붙이고 넘어갈수도 있었지만 그 노골적인 경멸조, 눈빛, 표정을 대하는 순간 놀라움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있었던 사실을, 두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처절하게 체험하고 나서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나에게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사브리나의 그 에피소드가 선명하게 떠오른 적이 없다.


 당신은 밀가루 반죽이 되어본 적이 있나요?      

 

 내가 조건없는 선의를 기쁜 마음으로 베풀었다고 해서 상대방도 똑같이 그럴거라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아니, 그걸 기대했던 것 자체가 조건을 달았던 선의였는지 모른다. 인간의 형편없는 이면을, 가장 친했던 친구의 얄팍한 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 또한 어리석음이고 죄라면 죄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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